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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 성령 세례와 충만목회참고자료/기독교 도서 2021. 11. 17. 13:13
성령이라는 약속된 선물은 성령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한 번 성령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방언과 예언, 병 고치는 은사만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의 전부인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 존 스토트 특유의 논리 정연함과 명쾌함이 돋보이는 본서는 성령의 약속, 충만, 열매, 은사라는 네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성령의 사역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다루고 있다. 성령의 사역과 활동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성령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고 또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활용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더 분명히 깨닫게 할 것이다.
▣ 차 례
서문
서론
1.성령의 약속
2.성령의 충만
3.성령의 열매
4.성령의 은사들
결론
성령 세례와 충만
존 스토트 지음/김현회 옮김
IVP/2002년 2월/150쪽/5,000원
서문
어떤 사람들은 ‘신오순절주의(neopentecostal)’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은사주의(charismatic)’로 알려진 한 운동이 계속 퍼져 왔다. 이제 이 운동은 가히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고, 대단히 존경받는 교인들도 이 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운동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대 교회의 모습을 평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이 운동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신 사실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은사주의 운동은 아직까지 매우 유동적이며, 그 지도자들이나 구성원들이 모두 신학적으로 서로 일치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이들은 ‘오순절주의’의 입장을 전부 수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오순절파 교회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어떤 이들은 자칭 ‘오순절적’ 경험이라고 즐겨 부르는 것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전통적인 의미의 ‘오순절파 신학’의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이해에 있어 유동적인 상태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신학적으로 올바르게 표현할 방법을 계속해서 찾고 있다. 나는 스스로 ‘은사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가 쓴 글에서 자신의 입장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느낄 수도 있음을 미리 사과하고 싶다!
나는 대화의 진전을 위해 우리가 동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가지 영역을 제안했다. 첫째, 진리의 객관성이다. 우리의 모든 전통과 모든 의견과 모든 경험은 성경의 진리라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금석에 종속되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중심성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와 교회의 머리시고,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것”이며(1:11~18),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2:9),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는 것을(2:10) 받아들인다. 셋째, 우리는 삶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은, 영적 경험은 매우 다양하며 또 영적 은사에도 상당히 여러 종류가 있다고 믿는다. 만일 우리가 서로 속박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기만 한다면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교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
이 연구를 시작하면서 먼저 네 가지 서론적인 요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에서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설명하는 부분은 교훈하는 부분에 근거해서 해석될 때에만 유익하다는 것이다. 사건을 묘사하는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은 그 안에 설명적인 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해석을 제공하는 반면, 어떤 이야기들은 독립적으로는 해석될 수 없고 다른 곳에 나오는 교리적 혹은 윤리적 가르침의 견지에서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것은 ‘저희에게 … 거울이 되고 … 우리의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전 10:11: 참고. 롬 15:4) 넷째,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는 학문적이거나 논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개인적이어야 한다.
1. 성령의 약속
성령이라는 이 약속된 ‘선물'은 성령의 ‘세례’와 동일한 것인가?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확신이 나뉜다. ‘선물’과 ‘세례’는 다르다고 말하는 자들은, 아무리 최소한 이상적으로는 세례가 선물에 바로 뒤이어 나타난다 하더라도, ‘세례’를 두 번째요 나중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반면에 두 가지가 같다고 보며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성령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생생한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는 자들은, 이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것으로 여긴다. 내 입장은 후자인데, 이제 곧 그 입장의 성경적 근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상세히 설명 할 것이다.
공관복음의 세 저자가 단순 미래형으로(“그가 세례를 주시리라") 기록한 요한의 이 말이 제4복음서에서는 현재분사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요1:33). 현재분사형을 사용한 것은 그 일이 특정한 시간대에 한정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오순절의 단회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독특한 사역을 나타낸다.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이다." 요한이 ‘세례자’ 또는 ‘세례 주는 자’로 불린 것은 물로 세례 주는 것이 그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듯이, 예수님이 ‘세례자' 또는 ‘세례 주는 자'로 불린 것도 성령으로 세례 주는 것이 그분의 사역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도 오순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외쳤다(행2:38). 이렇게 말함으로써 베드로는, 회개하고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회개의 신앙을 공적으로 증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두 가지 선물, 즉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었음을 확증했다.
이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처음 두 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이 ‘성령의 선물’은 바로 그 앞에서 언급된 ‘성령의 약속’(행 1 :4: 2: 33, 39), 성령의 세례’(1:5), ‘성령의 부어 주심’(2:17,33)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표현 중에서 두 가지는 성령을 주는 쪽을 더 강조하는 반면 나머지 두 가지는 받는 쪽을 더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에 나오는 회개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이 오순절 전에 약속하셨던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오순절에 부어 주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동일시에 대한 확신을 계속 유지했다. 후에 고넬료가 회심하고 성령을 받았을 때 베드로는 그것을 똑같이 성령의 ‘세례’와 ‘선물’이라고 지칭했다(행 11:16~17).
논증의 다음 단계는 성령의 부어 주심 또는 세례가 단지 새로운 시대의 독특한 축복일 뿐만 아니라 (이 축복이 그 이전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한 보편적 축복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이 축복이 이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생득권(birthright)이 되었다는 점에서). 첫째는, 요엘의 예언과 그 예언에 대한 베드로의 이해이다. 하나님이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약속에서 강조점은 성령이라는 선물의 보편성이다. 베드로는 그 예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행2:17). 여기서 '모든 육체'는 이 선물을 받는 데 성별이나 나이, 지위나 인종 등이 전혀 상관없다는 뜻이다. 구약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역을 위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임하셨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38~39절, 그의 설교 결론에서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의 약속의 범위는 그분의 부름심의 범위와 같음을 밝힌다. 이 신성한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이 신성한 약속을 상속받는다.
사도행전 2장에 의하면 오순절에 120명과 3,000명의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 또는 '선물'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3,000명은 처음 그룹의 사람들과 같은 기적적인 현상을 경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베드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확증에 의하면, 그들은 같은 약속을 받았고 같은 선물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12명과 3,000명의 두 그룹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표준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첫째 그룹이 아니라 둘째 그룹인 3,000명의 경험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120명의 경험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은 단지 역사적인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순절 전에는 선물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오순절 사건은 기독교 교회역사에서 때때로 이어져 왔던 최초의 '부흥'으로서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표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이미 생명으로 충만해진 것이다"(골 2:9~10).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충만함 가운데 주셨다면,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가 그분의 성령으로 이미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더 보태실 수 있겠는가? 뭔가 다른 선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야말로 예수님의 충만하심과 만족케 하심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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