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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영적 강자의 조건목회참고자료/기독교 도서 2021. 11. 24. 13:39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잘 무장하면 마귀와의 전투에서도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천하무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성도들을 위한 신앙 지침을 하나님의 전신갑주 6가지로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요약하고, 성도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말씀이 뜻한 바가 뿌리내려 풍성한 삶의 줄기와 열매로 자라나도록 이끌고 있다. 우리의 야전사령관인 예수님은 무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다.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지심으로 승리하셨다. 지름길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희생으로 마귀를 제압하셨다. 우리도 세상에서 들려오는 큰 음성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거기서 삶의 단서를 찾아내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겠다.
▣ 차례
1부 천하무적의 영적 무장을 하고 싸운다
1장 비무장으로 전투에 나설 수 없다
2장 한마음을 품으면 세상이 벌벌 떤다
3장 자기 의가 아니라 십자가의 의로 항전한다
4장 하나님의 심정으로 복음의 선무전을 수행한다
5장 빗발치는 화살도 방패 뒤에 숨으면 피할 수 있다
6장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세상을 이긴다
7장 신령한 검술로 마귀를 제압한다
2부 야전사령관 예수님의 영적 전술전략으로 승리한다
8장 문제에 착념치 않고 변화됨으로 승리한다
9장 과시욕을 버리고 낮아짐으로 승리한다
10장 지름길을 거부하고 대가를 치름으로 승리한다
영적 강자의 조건
전병욱 지음
규장 / 2003년 7월 / 278쪽 / 9,800원
1부 천하무적의 영적 무장을 하고 싸운다
1장 비무장으로 전투에 나설 수 없다
한동안 교회 역시 기본보다는 이미지, 포장, 평판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교회의 기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성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본질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결국 기본으로 돌아갈 때 생명을 되찾을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예수살렘 교회에 위기가 처하자 사도들이 내린 결정이 무엇이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 6:4).
이스라엘은 르호보암 이후에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노역의 짐을 덜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르호보암은 젊은 신하들의 말만 듣고, 그 짐을 한층 더 무겁게 과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지도자로 한 혁명을 일으킵니다. 분명히 여로보암 혁명은 르호보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 여로보암 혁명은 본질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벧엘과 길갈에 우상을 만들었으며 영적으로 더욱 음란해졌습니다.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더욱 악해졌습니다. 악을 이기겠다고 출발했으나 자신들이 더 악해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진리가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개혁은 더욱 악하게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개혁’이 아닌 ‘개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붙들고 처음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고유의 프로그램 하나쯤 만들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경을 보다가 에베소서 6장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이 여섯 가지를 점검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별다르게 대단한 프로그램을 실시하지 않아도 영적으로 건강한 교회, 부흥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갔습니다. 마귀의 주요 공격 루트는 여섯 군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꿰뚫어 보시는 우리의 대장 되신 주님께서는 유비무환의 무장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전신갑주 여섯 가지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입니다.
마귀는 치밀한 작전회의를 거쳐 그리스도인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물리칠 수 없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잔재주나 잔꾀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사람은 신앙의 속 실력, 곧 보이지 않는 뿌리를 강화시키는 부분에서 1등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며, 겉으로 드러나는 자세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혜 주실 때, 그분은 그때마다 엎드릴 줄 아는 자를 중용하십니다.
2장 한마음을 품으면 세상이 벌벌 떤다
진리의 허리띠를 띤다는 것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 즉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실성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베드로전서 1장 13절에 이와 비슷하게 유추해 볼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여기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와 ‘근신하여’는 동의어입니다. 삼가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허리를 동인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진리의 허리띠를 띤다’는 것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 즉 성실성을 의미합니다. 너풀거리는 옷자락을 단단히 여미기 위해 허리띠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나라 안에서 활동적으로 집중력 있게 일하려면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단단히 조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신령한 군사가 스타트라인에 선 자세입니다.
그러려면 싱글 포커스의 인생을 사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 훨씬 강한 것은 항상 초점이 하나인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만 바라볼지라”라고 찬양하며 “오직 주밖에 없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일 초점의 인생을 삽니다. 향방 없이 총을 쏘면 산탄만 허비할 뿐입니다. 인생에서 조준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리 분주합니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 아닙니까? 기도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간다면 초점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통합 능력을 키우십시오. 세간에 저희 교회에 엘리트들이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참 살기 힘든 젊은이들만 모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다. 말없이 기도하고 준비하고 계속해서 의견을 좁혀나갑니다. 의견이 하나로 모아질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합니다. 그 과정을 참 잘해나갑니다. 몸에 배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시키든지 간에 계속 하나로 모으는 힘을 발휘하여 주어진 일들을 해냅니다.
요즘 인터넷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합니까? 그런데 불꽃 튀는 공방이 벌어지는 사이트의 게시판에 들어가 보십시오. 속성상 그 논쟁이 분열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논쟁을 할수록 분열에 분열만 거듭될 뿐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인터넷상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의견을 통합시킬 수 있습니까? 잘 통합되지 않습니다. 통합 지향적인 시스템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조직이나 하나 되게 만드는 통합 능력이 있어야 그 조직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 통합 능력이 무엇인지 속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도와 말씀입니다. 가정에도 통합 능력이 필요합니다.
제임스 돕슨은 그의 책 <내 아들을 남자로 키우는 법>에서 오늘날 수많은 가정이 깨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가정의 통합 기능이 마비되자 가정이 해체되어 가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혼이 다반사가 되고 어린 자녀들은 정신적 지주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국가나 교회, 가정 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경에는 도처에 그런 통합 능력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내 심령을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 인간과 인간을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 사회를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 그 능력들을 키우면 우리는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헷갈리게 합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기도로 통합을 도모해 나가야 마귀의 분열 기도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3장 자기 의가 아니라 십자가의 의로 항전한다
의의 흉배로 무장한다는 것은 내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 십자가의 의를 붙드는 것입니다. 마귀가 맹공격해 올 때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면 박살납니다. 예수의 십자가 의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담대히 맞서면 마귀를 꺾을 수 있습니다.
마귀의 사명은 밤낮 정죄하고 참소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송사와 마귀의 참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죄를 깨닫게 하고 반드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여 마침내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성령이 송사하는 근거는 사랑입니다. 반면 마귀의 참소는 우리를 절망하고 낙망케 하여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분노와 감정에 호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고, 자살을 생각하고, 좌절하고, 마약에 손대고, 허랑방탕에 빠지는 것은 다 마귀의 참소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정죄하며 달려들 때, 우리는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그보다 더한 죄인이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그런 다음 “예수님이 나를 구속해 주셨는데 네가 어쩌겠느냐?”며 배짱 있게 나가야 합니다. “내 죄는 전부 사해졌고, 하나님께서는 더러워도 아쉬운 대로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하는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집에 있는 조금 더러운 그릇도 주인이 필요하면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당연합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의의 흉배를 붙인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된 의를 붙들고 마귀와 맞서야 합니다. 전가된 의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19-20).
내가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내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칭의’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는 내 삶이 과연 그렇게 의롭기만 합니까? 신분상으로는 의인이지만 실제 내 삶은 결코 의롭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의 실상을 어떻다고 파악해야 합니까? 분명 현실에서 내 삶은 의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의롭게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께서 의롭다고 믿어주시니 점차 의롭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롭게 되는 과정을 가리켜 ‘성화’라고 합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뛰어난 기독교 변증서에서 주기도문의 첫 문장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시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죄꾸러미인 우리가 이렇게 성부와 한마음을 품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미리 행세하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아들로서 미리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은 아무리 사실에 근거해서 하는 비판이라 해도 복음의 본질을 간과한 율법주의입니다. 복음은 현재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 엉망으로 살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도 예수만 믿으면 의인이 될 수 있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다. 반석이다. 너는 장차 회복될 것이고 헌신할 것이다”라며 끝까지 믿어주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믿고 기대하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의의 흉배는 악한 마귀의 궤계에서 우리를 지켜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원리를 사용하면 우리 가정이 살고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복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교회 교인들은 얼굴이 밝습니다. 다 죄인들이기는 한데 ‘밝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건져주셨기에, 붙들어 주셨기에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뜨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 공로, 자기 의를 의지합니다. 교회에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사라지자 자꾸만 세상 앞에 다른 것을 가지고 나가 승부를 보려고 합니다. 얼마나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지 보이려 하고 얼마나 긍휼을 베풀고 구제에 힘쓰는지 드러내려 합니다. 또 얼마나 정직한지 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열매일 뿐,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교회는 다시금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로로는 교회가 일어설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십자가의 의로 악한 마귀의 모든 궤계를 물리쳐야 합니다. 십자가 기치 아래 나머지 것들을 세워야 합니다. 개개인의 신앙과 한국 민족 전체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전할 복음이 없습니다. 십자가 외의 대체물로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하지 마십시오. 사이비 복음을 전하려 하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만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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