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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의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
    목회참고자료 2021. 11. 19. 13:38

    주후 250년 부터 300년 사이의 기독교는 상상하기 힘들정도의 엄청난 박해를 견디며 굳건히 성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박해 역시 오랜기간 지속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심하게 박해하던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박해를 시작한지 2년만에 자발적으로 퇴위한 후 황제가 되려고 다투는 자가 동시에 네명이나 등장하였습니다.

    동쪽에는 리시니어스(Licinius)와 막시무스 디아스(M. Dias) 서쪽에는 콘스탄틴(Constantin)과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서로 황제가 되기 위하여 일어났으며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콘스탄틴과 리시니어스, 디아스와 막센티우스가 동맹을 맺었다.

    결국 이들의 왕위 다툼은 주후 312년 콘스탄틴이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위하여 로마로 진군하여 승리함으로 끝을 맺게 되었는데, 콘스탄틴의 승리의 배후에는 기독교의 힘이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숫적으로나 장비면에서 콘스탄틴은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막센티우스의 강력한 군대를 두려워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그는 더욱 강력한 힘을 의지하도록 고무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침 막센티우스는 이교의 신을 숭상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며 그 신의 이름으로 군대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에 대해 콘스탄틴은 수백년간 모진 박해를 다 당하면서도 여전히 불길같이 맹렬한 속도로 뻗어가는 기독교에서 알수 없는 힘을 느꼈으며 막센티우스의 이교의 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기독교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콘스탄틴은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를 동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오에 기도하고 있을 때에 이것으로 승리하라고 새겨진 빛의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고 다시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이 표지로 깃발을 만들어 싸우라는 멸령을 받았다.”

    그는 십자가를 그린 군기를 들고 멜비우스(Melvius)다리에서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황제가 되었으며, 동맹을 맺었던 리시니어스와 주후 313년 밀란(Milan)에서 회담을 갖고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각각 통치하기로 하는 한편 동,서제국 어디에서든지 기독교를 마음대로 믿을 수 있도록 선교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외적으로 나타난 것만을 보면 그저 지도자를 하나 잘 만나서 기독교가 로마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로마제국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고 있던 로마제국을 이교의 종교로 이끌어 나가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웠으므로 우주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둘째로 잦은 전쟁으로 인하여 서민 대중들의 살림이 피폐해지면 질수록 기독교회의 인격적대우와 사회적인 도움 그리고 내세적인 소망에 만족감을 찾으려 했으며,

    셋째로 순전히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순교자들이 남기 놀랍고 감명적인 인상, 성육신 성례등의 교리와 의식을 통한 내세와의 확실한 연결, 인간 전체에 적용되는 자제;자기희생;도덕;금욕생활, 그리고 통일된 하나의 교회등의 요소가 결국 로마로 하여금 기독교를 인절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주후 380년에 이르러서는 데오도시우스(Theodosius)황제가 칙령을 내려 모든 로마제국의 백성들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준 신앙만을 가지도록 명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로마제국 안에는 오직 한 종교 즉 니케아 신조에 입각한 정통신앙의 기독교만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만이 국교가 되고 다른 종파와 이교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주후 529년 저스티니안 1세 황제가 아테네에 있던 플라톤파의 아카데미를 폐쇄하므로 로마제국 내에서 이교는 그 자취를 완전히 감추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부터 몇가지 악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첫째로 목숨을 걸고 믿던 박해시적의 그 불길같은 믿음들이 사라져 갔다는 점이며, 둘째로 기독교가 황제와 손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또한 황제는 교회의 내정을 간섭하고 뿐만 아니라 교리와 신앙에 대하여서도 강력한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 공인되고 국교로 인정받아 그 모진 박해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오히려 교회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불길같이 타오르던 순교자적인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자세히 말한다면 로마 천주교의 정권을 등에 업은 타락에 대하여는 7월부터 시작되는 강의시간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의 기독교를 선교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싯점에서 주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기독교가 어려움과 박해중에 있을 때에는 오히려 불같이 타오르는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었으나,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이후 오히려 그 신앙은 퇴색하고 순수함을 잃어버렸으며 세속과 결탁하고 타락하는 길을 것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음시간에는 기독교의 초기 즉 주후 200년경 까지에 나타난 기독교의 이단사상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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