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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한 웨슬레
    목회참고자료 2021. 11. 19. 13:35

    요한 웨슬레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1703년 6월 28일 영국 엡워드교구 목사

    사무엘 웨슬레와 아내 수산나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친가의 독실한 종교생활 환경에서 자

    라나 그 믿음이 신실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에 [가정학교]를 만들어 열아홉명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치며 교수과목과 교육방침도 결정했다.

    자녀교육의 제일의 목표를 규칙 생활로 정해 아이들의 방종을 제재함

    으로써 착실한 종교교육을 시켰으며 매일 저녁 시간을 정해놓고 개별상

    담과 기도도 해주었다.

    요한 웨슬레가 위대한 종교지도자가 된 것은 이런 어머니의 영향이 컸

    다.

    일년에 한번 엡워드교구 목사의 집에서는 [알파벴잔치]라는 것이 있었

    다. 이는 자녀가 다섯살이 돼 첫 공과를 배우기 시작하는 날로 첫날은

    ABC를, 다음날부터는 창세기를 보며 철자법 독법 서법 등을 가르치며 산

    수 문법 역사 지리도 차례로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이 6세 되던해 엡워드 목사관에 불이나 [가정학교]는 잠시

    중단된다.

    1707년 2월 7일

    집을 삼킬듯한 불길이 목사관을 휩싸자 식구들은 깜짝놀라 잠에서 깨어

    났다. 아이들은 형들과 함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들

    을 점검해보니 한 아이가 없었다. 그때 [사람살리라]라는 소리가 목사관

    2층에서 들렸다. 웨슬레가 창문에 몸을 내밀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버지

    가 뛰어 올라갔으나 사나운 불길에 쫓겨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한 농부가 다른 사람의 목마를 타고 올라가 웨슬레를 구해 내려오자마자

    목사관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이 위험한 사건을 겪은 웨슬레는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었고 그의 80여년의 생애동안 [화재]와 [구원]에 대한 인상

    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요한 웨슬레는 11세가 되자 런던의 [차터하우스] 중학에 입학했다.

    그는 지식의 풍요로움을 위해 열심히 탐구하고 노력했으나 신앙면에서는

    성장하지 못했다.

    당신의 신앙생활의 게으름을 후에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외부에서 가하는 억제가 없어졌을때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게울러졌

    다. 그래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마저 소홀히 했다]

    그는 6년만에 차터하우스의 교육과정을 마친후 옥스퍼드로 갔다.

    웨슬레는 1년에 40파운드의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의 그리스도교

    회대학에 입학했다.

    웨슬레는 재학중 우수한 성적을 얻기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논리가 뛰어나 학우들과 논쟁하면 언제나 상대를 꺾고 말았다.

    1725년 22세때 그는 생애에 큰 전환기를 맞게된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한 웨슬레는 마침내 성직의 길을 걷기

    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 흡잡을게 없었으나 성직

    을 맡기엔 부족한 것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영적경험을 사모하는 마

    음이 작은 것이었다.

    [ 나는 아직 내마음의 성결에 대한 관념조차 갖지 못하였다. 나의 종교

    생활은 다만 습관에 지나지 않았고 명백한 죄를 범하면서도 뉘우치는 마

    음이 없었으며 도리어 그 죄에 만족하였다.

    그가 먼훗날 그때를 회고하며 한 말이다.

    웨슬레가 사도직을 걷기로 작정하는데 큰 영향을 받은 책은 토머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

    음]이다.

    [하나님의 인도로 나는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

    다. 나는 이책을 읽음으로써 참된 종교는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우리의 언행뿐 아니라 우리

    의 사상에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레는 이때부터 하루에 두시간 이상을 신앙생활하는데 보냈으며

    내적 성결을 위하여 힘썼고 기도도 열심히 하여 그리스도에게 몸바칠

    각오로 살았다. 그리고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갖지 못했던 그리스

    도인의 헌신과 성결에 대한 도리를 깨달았다. 웨슬레가 쓴 [그리스도

    인의 완전론]의 기본 사상은 아켐피스의 저서에서 영향 받은 바 크다.

    또한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란 책은 그가 아켐피스에

    게서 얻은 신념을 더 굳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 한없는 감동을 받았다. 나는 나의 생명 전체

    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 자신을 자신에게 바친다는 것은

    결국 악마에게 바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시기는 웨슬레의 생애에 있어서 큰 전환기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중생의 경험은 이로부터 13년뒤에 얻었으나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몸바쳐 살겠다는 목적을 세우기는 이때였다.

    요한 웨슬레가 집사안수를 받은 것은 그가 22세때인 1725년 9월19일

    이었다. 옥스퍼드 그리스도교회대학 교회당에 옥스퍼드감독 요한 피터

    에게 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는 그로부터 3년뒤에 받았지만 가끔씩 설교를 했다. 그의 설

    교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당시 설교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술

    회했다.

    [1725년부터 2년동안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그때 청중이다. 신

    자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회개의 도리와 복음의

    진수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속에

    대한 신앙을 전파하지 않은 까닭으로 내 설교에는 힘이 없었고 감화력

    에 없었다]

    1726년 3월 11일 웨슬레는 링컨 대학의 특대학생이 되었다.

    이 대학에 간지 얼마 안되어 그는 희랍어 강사직과 토론회의 심판장

    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희랍어 성경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그의 신학

    사상을 그들에게 불어 놓어주기에 힘썼다. 또한 주일은 제외한 토론회

    에서 학생들의 언론을 비평하고 평가해주었다. 그가 문학사의 학위를

    받은 것은 1727년 이었으나 당시 그는 웅변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웨슬레의 부친 사무엘 웨슬레는 65세의 고령인데도 엡원교구와 우릇

    교수 둘을 맡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혼자서 두 교구를 맡기엔 힘

    이 벅차 아들 요한 웨슬레를 부목사로 초빙했다.

    웨슬레는 2년 3개월동안 부친 교구에 봉직한후 1729년 옥스퍼드대학

    조교수로 피선돼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한편 요한 웨슬레의 동생 찰스 웨슬레가 옥스포드 그리스도교회 대학

    에 입학한 것은 1726년 그의 나이 20세가 채되지 않아서였다.

    그는 남달리 영리하고 비범한 재사였고 형이 오기전부터 교내에서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종교모임을 가졌다. 서로 뜻을 같이하는 그의 동

    지들과 함께 매일매일의 학과 일정표를 만들고 종교적 의무를 지키며

    침식시간을 될수 있는대로 줄이는등 신앙향상을 위해 많은 시간을 썼

    다. 그들은 이러한 규칙 생활로 동창학우로부터 [규칙장이들](metho-

    dists)라는 별명까지 듣게 되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로 돌아온후 즉시 동생이 조직한 단체[신성

    구락부](holy club) 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729년. 타락한 조국을 바로잡고자 뜻있는 청년 몇사람이 조직한 [

    신성구락부]는 신임회장 요한 웨슬레를 맞았다. 회원 네명중 세명은

    대학조교수였고 나머지는 대학재학생이었다.

    웨슬레는 이들을 지도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으로 신중히 하였

    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일반회원들에게 항상 겸손했다.

    그들은 매일밤 모여 기도하고 희랍어 성경과 고전문학을 연구했다.

    [신성구락부]의 성경연구의 첫 열매는 구제운동이었다. 그들은 부채자

    를 방문하고 병자위문을 하는등 여러가지 봉사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옥스포드 감독의 허가로 그들은 감옥 뿐 아니라 시내의 가난한 가정

    도 심방하였으며 무산아동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다. 한번은 남루한

    옷을 몸에 걸친 소녀 하나가 웨슬레에 구걸했다.

    [너는 대단히 배가 고픈 모양이로구나. 옷은 그것밖에 없니]

    웨슬레는 그 소녀에게 돈을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앗으나 돈이

    없어 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의 서재 벽에는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마치 자신을 꾸짖는 것같았다.

    [나는 가련한 소녀의 배고픔을 면케 해줄만한 돈으로 내집의 별을 장식

    하지 않았는가. 아 - 내 마음엔 공의도 없고 자비도 없다.

    이 그림들은 저 가련한 소녀의 피 값이 아닌가]

    이때부터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그

    들의 수입중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잔

    액 전부를 구제비에 썼다.

    웨슬레는 연수입 30파운드를 제외한 2파운드를 내놓았고 이듬해는 60파

    운드의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32파운드를 구제비로 썼고 다

    음해 역시 90파운드 수입중 생활비 28파운드를 제외한 62파운드를 가난

    한 사람들을 위해 썼다.

    1735년 4월 25일

    웨슬레의 부친 엡윗교구 목사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웨슬레가 몇몇 신성구락부 회원들과 식민지 북아메리카 조지아로

    선교여행을 떠나고 남은 신성구락부 회원들은 계속 모임을 갖다 졸업

    후 목사직을 받고 작자 흩어지고 말았다.

    이 단체가 해산된 이후에도 그들이 남긴 향기를 얼마간 옥스포드 학

    원에 머물렀다.

    그들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엔 영국 전

    역에 믿음의 불을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과

    전세계에 신앙의 불꽃을 일게 하였다. 감리교가 처음 일어난 곳이 바로

    이 신성구락부였다.

    웨슬레는 그의 끝없이 타오르는 종교적정열로 완고한 영국교회의 안일

    주의와 의식에 치중한 생활을 박차고 믿음의 요람인 옥스포드 대학의

    영직을 사직하고 북아메리카로 전도여행을 떠난다.

    이 전도단은 1735년 10월 18일 시몬주호를 탔는데 이 배에는 모라비아

    인들과 80명의 영국이민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그들이 미대륙에 도착하기까진 8주나 걸렸는데 이 항해는 웨슬레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특히 선객들중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제를 통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용감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항해도중 여러차례의 풍랑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웨슬레는 공포에 떨

    었다. 그러나 독일 모라비안교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태연했다.

    폭풍이 지난후 웨슬레는 한모라비아교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 하나님께서 감사한 일입니다만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

    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날 웨슬레는 그의 일기장에 [나의 일생중 가장 영광스런 날이었다]

    고 기록했다. 그 영광은 웨슬레가 구원의 빛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웨슬레가 일생 처음으로 그 구원의 빛이 존재함을 깨달은 것이다.

    1736년 2월 6일. 웨슬레 일행이 탄 배를 조지아에 도착했다. 배가 도

    착하자 웨슬레는 자신의 신앙이 무언가 잘못돼 있음을 깨달아 모라비

    아교 목사 스팽겐베르크에게 신앙상담을 요청했다.

     

    *** 요한 웨슬레 (2) ***

     

    웨슬레는 조지아에 도착한후 모리비아교단의 스팽겐베르크목사와 대

    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신앙 체험을 한다.

    [웨슬레 선생,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계

    십니까]

    이 물음에 웨슬레는 무슨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이때 스팽겐

    베르크목사는 다시 질문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웨슬레가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네.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웨슬레는 대답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팽겐베르크목사의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말에 웨슬레는 [나는 ...알죠]

    라며 입숙에서 겨우 웅얼웅얼 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영적생활의 실태를 이렇듯이 심각하게 검색하는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다.

    이 문답이야말로 그의 항해중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스팽겐베르크

    목사와 대화하면서 웨슬레의 마음속에는 섬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이

    섬광은 극히 순간적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어둠이찼다.

    그후 웨슬레는 사바나시에 도착해 첫 주일은 맞아 고린도전서 13장을

    낭독하고 [사랑]이란 주제로 설교했다.

    사바나에서의 활동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반신도들이 사치품을

    멀리하고 귀부인들도 검소한 의복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그곳에 주간학교를 설립한 후 아이들을 직접 가르쳤다.

    웨슬레는 주일마다 분주했다.

    오전 5시 새벽기도회를 열었고 11시에는 성찬식과 설교를 했으며 오후

    1시에는 프랑스인 예배에 참석하고 2시에는 유년들을 모아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또 3시에는 기도회를 인도하였으며 6시에는 모라비안인 교

    회에 나갔다. 토요일에는 사바나시 부근에 있는 2개 마을에 들러 독일

    인과 프랑스인들의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평일에는 스페인출생의 유대

    인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서반아어를 공부하였다.

    웨슬레는 이와같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노력하였지만 신도

    들을 젖으로 먹이지 않고 그들이 먹기 어려운 극단의 교회주의와 금욕

    주의의 굳은 음식으로 먹인 까닭에 그 비상한 활동과 노력은 아깝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몇가지 예를 들면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

    찬을 허락지 않았으며 국교도 자녀에게는 다시 세례를 주었고 영국 교

    회에서 세례를 받지않은 자에게는 장례식예배를 거절했다.

    또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엄격한 태

    도 때문에 그는 일반신도들의 호감을 잃었다.

    그와 때를 같이해 생긴 불행한 연애사건으로 그의 조지아 선교사업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 합키라는 미모의 여인과 서로 열

    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사정이 생겨 그 여자와의 결혼을 단념했다.

    어느날 웨슬레가 성만찬식을 집례하는데 이 신혼부부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자 웨슬레가 이 부부를 내쫓았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남편은

    여러가지 불명예스러운 구실을 만들어 웨슬레를 고소하였다. 그

    러나 고

    소의 내용은 그다지 대수로운 사건들이 아니었을뿐 아니라 동기가 웨슬

    레를 실각케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돼 기각되었다.

    비록 아무 근거없는 고소사건이었으나 그에게는 불명예스런 일이었고

    그대문에 신도들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표시돼 웨슬레는 조지아선교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737년 12월 2일 웨슬레는 귀국의 여정에 오른다.

    사바나를 떠난 웨슬레는 천신만고 끝에 찰스타운에 도착,영국행 범선

    을 타고 1738년 2월1일 고국에 도착했다. 도착후 그는 조지아 선교때

    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나는 인도인(아메리카)을 회개시키려 아메리카로 건너갔었다. 그러

    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나는 외관상으로는 훌륭한 신자다.

    위험이 없는 한 설교도 잘하고 믿음도 좋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람

    들에게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외칠

    수 있는 신앙을 원한다]

    조지아선교 실패로 인해 그는 지극히 낮아졌다.

    웨슬레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 모라비아교단의 신도들과 신앙교제를

    했다.그들 중 페터 볼러와의 대화는 웨슬레의 신앙에 큰 교훈을 주었

    다. 그는 볼러로 말미암아 그의 불신앙을 깨닫게 되었다.

    중생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깨달은 그는 [내가 전도를 중지하

    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묻자 볼러는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선생

    은 믿음을 얻을 때까지 그 믿음을 얻은 후에는 그 믿은 믿음을 전하시

    오]라고 대답했다.

    웨슬레는 볼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이튿날 아침 옥스포드 감옥에 있

    는 한 사형수에게 믿음으로 구원얻는 도리를 전도했다.

    다음주일 웨슬레는 퀘이커교 예배에 참석했다. 이것은 웨슬레의 부흥

    운동 뿐 아니라 감리회 예배의식 발전상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나는 폭스 (퀘이커교창설자) 회에 참석하였는데 내 마음속에는 형언

    할 수 없는 감격이 넘처 흘러 그동안 해왔던 기도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로운 기도를 했다]

    영국교회의 의식과 기도문에 따라서만 기도했던 그는 자유기도가 더

    은혜로움을 깨달았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레는 중생의 기쁨을 체험

    한다. 이날 그는 런던시 올더스게이트가의 성경연구와 기도를 목적으

    로 한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 한 낭독자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

    고 있었다. 그때 웨슬레의 마음엔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이상

    스럽게도 나의 마음이 뜨거워 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사하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중생의 경험은 웨슬레의 성격과 전도방법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때부터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레는 복음주의의 구원과

    새명을 전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웨슬레가 중생한지 18일후 옥스포드대학 앞뜰에서 [너희가 은혜로 말

    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 설교의 내용은 감리회 신앙개조의 표준이 되었다. 이 설교는 그의

    중새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인만큼 그의 중생 이전의 이론과 그 내용

    이 완전히 달랐다.

    영국국교는 웨슬레를 의식을 깨뜨리는 자로 가주, 그를 배척하기 시

    작했다. 벌써 런던에 있는 교회들도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9년에는 네 교회만 그에게 설교를 허락했다. 또 뉴케이트 감옥에

    수용된 죄수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전에

    해오던 방법으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게돼 그는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웨슬레는 영국교회 지도자들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1739년 4월 2일

    부터 야외설교를 시작했다.

    예의범절만 찾던 영국교회의 목사들은 제복차림으로 노천에서 전도

    하는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다른 목사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지만 그날 오후4시 나는 거리에서

    복음을 선포했다. 약 3천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웨슬레는 야외설교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의 새로운 선교방법에 대해

    성도들이 걱정을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나에게 내 능력에 따라 무지한 자를 가르치고

    악한 자를 바로잡고 덕이 있는 자를 견고하게 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교구에서 일하는 것을 막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이 세계를 나의 교구로 생각합니다.

    그렇기때문에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더라도 기쁜 구원의 소식을 듣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

    다.

    이것이 위슬레 대헌장의 요지다. 그러던중 웨슬레 일행에게 일대 수난

    이 다가왔다.

    찰스 스투얼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감기교도들에게 박해가 심했다. 그

    들이 갖는 [속회]와 [야간집회]를 교황권운동이나 왕권회복운동으로 오

    인, 교구목사들과 지주들이 폭도를 매수해 집회를 방해했다.

    이러한 폭도들의 행패는 1757년까지 계속됐다.

    1742년 웨슬레는 브리스톨에서 속회를 조직하고 첫 모임을 가졌다.

    속회는 대략 12명이 한팀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간증과 성경공부 모임

    을 갖는다. 이 모임은 오늘날까지 감리교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다.

    1776년 처음 발표된 총회통계를 보면 감리교엔 목사 97명, 성도

    1먼 9천 7백 61명, 순회지구 40개로 나타나있다. 그 일년후에는 성도

    가 2만5천9백11명으로 증가했다.

    조직이 커지고 양적으로 발전한 감리교는 1984년 웨슬레는 기독교사

    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첫 사랑의 상처때문에 평생을 독신

    으로 살려고 했으나 나이 48세때 미망인인 파질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의 변태 행각과 질투로 별거하게 됐으며 얼마후

    부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생활이 불행하게 끝난 반면 웨슬레가 받은 복은 컸다. 건강한 몸

    으로 장수한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분주하고 많은 많은 일을 했다.

    영국 전역과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등을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열

    었으며 4천번이상의 설교를 했고 일생을 통해 선교여행한 총거리가 40

    만 km 에 달했다.

    1790년 6월 28일 87회 생일을 맞은 웨슬레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부터 나는 87세가 된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느끼겠다.

    그러나 신체 어느 부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물결이

    멈추기까지 육체가 점점 쇠약해져 가는 것 뿐이다.]

    그해 10월 웨슬레는 수섹스주윈첼시교회 뜰에서 마지막 야외설교를

    했다. 그날 설교의 제목은 [만날만한때 주를 찾으며 그가 가까이 계실

    때 부르라]는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한 열로 앓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일을 중지하고

    시티 로드교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눕게 됐다.

    1791년 3월 2일.

    그의 작은 방에는 열 한사람이 모여 있었다. 침상위에 누운 웨슬레는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88세였다.

    그의 유해는 시티 로드교회 뒤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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