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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의 종교개혁
    목회참고자료 2021. 11. 19. 13:30

    영국의 종교개혁

     

    대륙과 스크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이 교회의 인물들에 의해 기도되었다면, 영

    국 종교개혁은 국가의 보호하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군주제의 보호하에 준비되

    고, 세워지고, 재건되었다. 헨리 8세는 로마와 결별하면서 종교개혁을 준비하였

    고, 서머세트공과 노덤버랜드 공이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종교개혁을 세웠으며,

    엘리자베드가 "옛 종교"로 자기 백성을 끌고간 메리 튜더의 죽음이후, 종교개혁

    을 회복시킨 것이다. 영국에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수많은 써

    클들을 통해 교회 갱신을 갈망했다.

     

    1. 헨리 8세의 분열

     

    16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이중의 양상을 띄었다. 한편에서는 경건운동

    이 꽃을 피워 전통신앙에 매달려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회계층에서

    교회 세금과 교황 지상권에 대한 모종의 적개심이 표출되었다.

    헨리 8세는 통치 초기에 토마스 월세이 추기경을 이용하여 수도원을 개혁하고

    성직자 양성을 줄이는 시도를 했다. 이 일을 하면서도 그는 전통 신앙에 충실히

    남아 있었다.

    이처럼 헨리 8세가 "신앙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무렵, 루터주의는 영국 대학들

    에서 최초의 지지자들을 맞이했다. 특히 캠브리지에서는 서클 하나가 "백마"라는

    여관에 모여 비텐베르크 사상을 논했다. 대부분이 성직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토

    마스 크랜머, 존 프릿, 윌리암 틴데일 등이 끼어 있었다.

    헨리 8세는 1509년 자기 형의 과부인 캐터린과 결혼을 하였다. 이 결합으로 6

    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오직 메리라는 딸하나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남자 상

    속인을 갈망하는 헨리 8세는 궁정의 젊은 여인 앤 볼린과 사랑을 느낀다. 그리하

    여 그는 1527년, 캐터린과의 결혼을 교황청이 무효화 해주기를 바랬다. 교황 클

    레멘트 7세는 영국 왕의 간청과 분리하겠다는 위협에 양보할 마음이 있었으나 캐

    터린이 칼 5세의 숙모였고, 당시 교황을 마음대로 하였던 칼 5세가 캐터린이 버

    림받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랜머를 시켜 큰 대학에 자문을 구하여 호의스런

    대답을 받고는 1531년 자신을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인정케 하였다.

    1532년에 그는 성직자가 교황에게 소득세를 바치지 못하게 하였고, 성직자로부터

    교회법의 전면 수정에 대한 의사 표시권을 얻어냈다. 나아가 1533년에 은밀히 앤

    볼린과 결혼을 하였다.

    이에 클레멘트 7세는 반발하였고, 헨리 8세도 영국 교회에 대한 재판권을 박탈

    하는 법률을 의회로 하여금 채택케하여 응수했다. 이 법률로 국왕이 성직자의 소

    득세를 받았고, 수장령(1534)에 이르러서는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지상에

    서 영국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라는 칭호를 주었다.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롬웰에

    게 이 법률을 적용할 임무를 맡겼다. 물론 저항이 일어났지만 착실히 진행되었

    다.

    이렇게 흐르는 동안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간통죄로 꾸며 참수시키고 제인 세

    이무어와 결혼하였다. 제인은 결혼 생활 17개월 뒤 아들을 하나 낳고 죽었는데

    미래의 에드워드 6세였다. 이렇게 사랑에 있어서 변덕스러웠던 왕은 종교문제에

    있어선 훨씬 일관된 정신을 보여줬다. 그는 교황과는 거리를 두었으나 정치적 이

    유로 정통에 머무르려 했다. 칼 5세와 프랑소아 1세 사이에 있을 수 있었던 동맹

    을 저지하기 위해서 1535년과 1536년에 독일 개신교 군주들의 지지를 모색하였

    다. 그러나 타협의 결론은 그다지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1536년 "소집"된 성직자 회에서 채택된 [10개 조항]을 통해 루터파와 가까와졌

    다.

    비록 [10조항]이 루터주의에 최소한의 양보밖엔 하지 않았지만 이 조항의 의미

    를 설명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1536년과 1538년의 [왕의 지령]은 보다 분명한 개

    신교적 어조를 간직했다. 이 [지령]은 성상, 성유골, 순례행각 등을 비난하였고,

    특히 신부들에게 신자들 각자가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

    도록 권면하라고 당부했다. 이로인해 번역성경들이 나타났다.

    1538년 6월, 발로아 가문과 합스브르크 가문 사이에 체결된 니스 휴전 조약은

    헨리 8세를 불안하게 하였다. 교황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토벌하기를 원했

    다. 영국 왕은 크롬웰의 조언에 따라 작센 선거후의 처제인 안나 폰 콜레베와 결

    혼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통 신앙의 증거를 가톨릭에게 보이기 위하여 [6

    개 조항] 법률을 가결시켰다(1539년).

    [6개 조항]이 보여준 신학적 경직현상은 1540년부터 두드러졌다. 전쟁은 발로

    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재발되기 직전에 있었고, 칼 5세는 영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따라서 헨리 8세는 독일 개신교 군주의 지원이 없어도 되었으

    므로 그는 안나 폰 클레베와 이혼하였다. 그리고 루터파와의 연합 정치로 부추켜

    왔던 크롬웰을 참수 시켰다. 1543년에 반 개신교적이인 [필요한 교리]란 책을 출

    판하였다. 헨리 8세는 1547년에 죽었다.

     

    2. 에드워드 6세 통치하의 종교개혁

     

    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는 제인 세이무어의 아들이었다. 겨우 9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종교개혁의 확고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혼자 통치할 능력이 없

    는 그대신 삼촌 에드워드 세이무어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다.

    세이무어는 선한 의지의 인물로서 확신있는 개신교도였다. 보호통치 초기부터

    영국교회를 종교개혁으로 차차 이끌어 가는데 진력했다. 그는 협력자로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를 삼았다.

    "개신교의 공세"는 1547년 7월의 [왕의 지령]이 발간되면서 시작되었다. [왕의

    지령]이 나온 지 몇달 뒤, 국회는 데 헤레티코 콤부렌도 법과 [6개 조항]을 폐지

    했다. 1548년에 더 나아가 성상들의 철거를 명했고, 사제들의 결혼을 인정했다.

    크랜머가 주재한 12명의 신학자 위원회는 새 예배모범의 초안을 작성하여 이

    초안을 통일령(1549년)으로 채택되었고 [공동 기도서]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이것은 교황주의와 비.국교주의 사이의 "중용의 길"에 성공적으로 들어선 형태였

    다.

    당국이 개혁을 신중하게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1549년 7월 여러 곳에서 폭동

    들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옛 종교"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으나 훨씬 정치적이요

    사회적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세이무어는 농민들의 편에 서서 대지주들의 욕망

    에 제동을 가하려 했기 때문에 대지주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보호자"의 직분에

    서 면직된 그는 1549년 10월,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반란자들을 진압했던 존 다

    들리로 대체했다. 다들리는 노덤버랜드 공작의 칭호를 획득한 뒤 세이무어를 참

    수시켰다. 그는 종교개혁 쪽을 택했다.

    노덤버랜드 세력이 도래한 몇달 뒤, 새로운 "성직 수임식 순서"가 만들어 졌

    다. 이후 종교개혁 지지파는 그동안 수많은 비판을 받아온 [기도서]를 개조하여

    크랜머는 1522년 두번째 [공동 기도서]를 출간하였다. 같은 해 이것은 제2의 통

    일령의 힘으로 강제성을 띠었고, 이것은 1549년의 것보다 훨씬 대륙적 개신교의

    특징을 지녔다.

    영국 교회에 복음으로 영감된 예배모범을 제공한 크랜머는 이제 그 교회에 신

    앙고백을 갖도록 하였다. 1538년 그는 루터파와 협상하여 [13개 조항]에 착상을

    얻어, 최종적으로 1553년 왕이 인정하여 노력 끝에 만든 [42개 조항]으로 간행

    허락을 받았다. 이 [조항]은 1522년의 [기도서]보다도 더 개신교적이었다.

    [42개 조항]을 승인한 지 한달 만에, 에드워드 6세는 16세의 나이로 죽었다

    (1533년). 노덤버랜드 공은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

    리고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헨리 8세의 종손녀인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

    로 지명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이 목표가 달성되자 그는 자기 아들들 중 하나

    와 제인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노덤버랜드 공의 평판이 크게 나빴고, 메리 튜더

    의 합법성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캐터린의 딸을 여왕으로 인정하고 만

    다.

     

    3. 메리와 엘리자베드 통치하의 가톨릭 복귀와 영국교회의 확립

     

    메리 튜더는 열렬한 가톨릭이었다. 그녀는 헨리 8세와 캐터린의 결혼 유효를

    인정하는 길은 영국에서의 교황 재판권 회복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새 여왕의

    합법성에 대한 비준도 그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 사촌인 칼 5세

    의 조언에 따라 메리는 먼저 에드워드 6세 통치 하에서 포고된 교회법들을 폐지

    하였다. 예배 의식들도 헨리 8세가 죽기 얼마 전에 만들었던 형태로 되돌아 갔

    다. 복음 사상에 가담한 주교들은 면직되었고 대신 헨리파 성직자들로 대체 되었

    다. 크랜머는 감옥에 들어갔고 대륙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따랐던

    수많은 영국인들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야 했다.

    메리는 의회와 백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왕위에 오르게 될 칼 5세의

    아들과 1554년 7월 결혼했다. 그녀는 부군의 지원을 받아 영국의 분리를 해소하

    기 위해 협상을 하여 영국의 동포들에게 교황의 사면을 전하였다.

    로마의 권위가 인정되자, 희회는 1529년 이래 선포된 모든 반 교황적 법들을

    폐지했고, 재산은 되돌려주지 않은 채, 헨리 8세 통치 초기의 상황으로 교회를

    재건시켰다. 1554년 말, 의회는 옛날 이단자들을 사형으로 처벌했던 법들의 효력

    을 다시 인정하였다. 이런 법률을 이용하여, 무자비한 박해가 터져 성경을 편찬

    한 존 로저스와 복음주의적 4명의 주교들이 화형대에 올랐다. 대주교 크랜머는

    개신교를 버림으로 자기 생명을 구하려 했으나 메리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용감히 자기 신앙을 고백했다.

    이 박해는 민중 계층에도 전개되어 불과 4년도 안되는 동안 약280명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박해는 결국 그녀가 1558년 11월에 죽고나서야 끝났다.

    메리의 이복 동생인 엘리자벱 튜더는 앤 볼린의 딸로서 영국 왕위에 오를 때

    나이 25세였다. 자기 어머니의 결혼 유효성을 놓고 로마 교회가 한 비판 때문에

    자연히 개신교가 되었다. 그러나 참된 종교적 확신으로 이끌림 받았다.

    국가의 대신 윌리암 세실의 조언을 받아가며 엘리자벱은 용의주도하게 일을 처

    리했다. 의회는 [수장령]의 효력의 재인정을 가결했다. 그녀는 "영국 교회의 최

    고의 우두머리"라는 칭호 대신에 "영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라 하였다.

    새 [수장령]의 포고와 동시에, 새[통일령]이 선포되었고, 이것은 1522년의 [공

    동 기도서]의 사용을 강요했다. 이처럼 가톨릭 측의 마음을 가라앉힐 목적에서

    1559년의 [기도서]는 수정되거나 삭제되었다.

    대부분의 하급 성직자들은 1559년의 [수장령]을 받아들였으나, 메리 통치때 자

    리잡은 대다수의 주교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므로 계급제도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매튜 파커가 캔터베리 대주교의 보좌에 올랐다. 주교단은 [42개 조항]의

    개정에 착수하여 성직자 회를 통해서 [39개 조항]을 승인케 했는데, 바로 이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영국 교회의 교리적 정책강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39

    개 조항]은 애매한 데도 있지만 대륙의 종교개혁, 보다 정확히 말해서, 칼벴의

    종교개혁에 소중한 개념들을 제시했다. 이렇게 [39개 조항]은 영국 교회에 매우

    다양한 신학적 경향을 공존케 하였다. 또한 동시에 [조항]은 이중의 반발을 야기

    시켜야 했다. 자기들의 신앙이 정죄되어 있음을 본 가톨릭의 반발과, 온전한 개

    혁 촉진을 염려하여 개혁의 개신교적 알맹이를 평가절하한 퓨리탄의 반발이 그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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