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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종교개혁
사실 루터는 분리할 생각도 없었고 또 분파의 창시자적 기질도 없었다. 보편
교회의 통일성을 누구보다 귀중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가 원한 것은 이 보편 교
회에 대한 개혁이었다. 그가 자기의 이상에 동조한 공동체들에게 하나의 조직을
부여할 생각을 한 것은 수년이 지나고 난 뒤였다.
1. 비텐베르크 운동
수년의 전투기간 동안,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복음주의 교리의 보루로 삼았다.
여기에서 그는 칼슈타트, 니콜라, 요나스, 부겐하겐, 스팔라틴, 멜랑히톤을 자신
의 입장에 가담시키거나 그들의 존경과 우정을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새 황제 칼5세가 주재한 보름스 국회에 루터가 불려 갔을 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세속당국은 민중봉기가 두려워 로마의 종교재판에 넘기기
를 거부하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철회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는 위험의 경고를 듣고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갔다.
1521년 4월 17,18일 양일에 루터는 국회 앞에 소환되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성
경의 증거에 의해 자신의 오류라고 확신케 되지 않는 한, 자신의 작품들을 철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칼5세는 분노하였다. 하지만 군주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루터를 굴복시킬
목적에서 계속적인 대화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루터는 4월 26일 황제가 발
급해준 통행증을 휴대하여 보름스를 떠났다.
현자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닥친 위험을 이미 예상했다. 그는 도중에 루터를
빼돌려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이곳에서 루터는 10개월간의 은둔기간 중
에 그는 [시편 연구]를 계속했고, [성모 마리아 송가 주석]을 완성했다. 또한
[교회 설교집]을 작성하는 한편, [신앙고백에 대하여]를 써서 의무적 고백을 반
대하고 자발적인 고백을 권장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자기 제자들의 관심사에
대답하는 [수도원 서약에 대하여]와 [개인 미사의 폐지에 대하여]를 쓰기도 하였
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번역에 전념하였다.
한편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개혁운동의 흐름이 젊고 수줍은 멜
란히톤의 태도에서 벗어나 급진적인 칼슈타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1521년
10월, 빵과 포도주 두가지로 성찬을 거행했다. 그리고 성탄일에는 독일어로 미사
를 드렸다. 1522년 1월, 교회의 성상들을 없애고 나서 "비텐베르크시의 규칙"을
포고했다. 결국 2월에 그는 기독교 백성이 스스로 통치할 권리가 있음을 선포하
였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다는 두 명의 방적공들의 영향을 받
아 조명주의 경향을 기울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권위보다 성령
의 내적 운동들을 더 좋아하게 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시작해 놓은 이 운동의 전개를 불안하게 보다가 은신처를 떠나
비텐베르크의 의회와 대학 호소에 응하러 갔다. 그 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설교
를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칼슈타트가 너무 빨리 해놓은 혁신들이 다시 거부되었
다.
문제들이 어느정도 해결되자, 루터는 로마의 신학자들에 맞서서, 그리고 예언
자들에 맞서 새 복음을 변호하기 위애 여기 저기 다니며 설교를 하였다. 또한 밀
도있는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교회 사역을 세움에 대하여]와 [기독교 회중이 교
리 문제를 판단하고, 설교자들을 청빙, 위임, 면직할 권리와 권세를 가짐에 대하
여]라는 논문들을 출판하였다.
2. 결정적인 거절들
라이프지히 논쟁 직후, 후텐을 선두로한 소 귀족 대표들은 루터를 로마의 보호
에서 해방되어 쇄신된 독일의 선구자로 존경했었다. 이러한 오해는 기사들의 반
란이 터지자 잘 드러났다. 그들은 이내 패퇴하였다. 이들이 루터에게 그들의 운
동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루터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그들의 것과 일치
시키를 거부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가 수호하려 했던 기독교인의 자유는 국민
(국가)의 자유와 혼동될 수 없었던 것이다.
2년 후, 루터는 농민들이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지지해달라는 요구를 또 다시
거부했고 이 결과는 심각했다. 반란이 지나가는 곳은 어디나 폐허가 되었다. 군
주들의 진압도 또한 끔찍했다.
농민들의 개혁안에 의견을 제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루터는 [슈바벤 농민의
12조항에 대한 평화의 촉구]라는 글을 써서 대답하면서 그는 기독교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연결시키기를 거부했다. 이런 태도는 자기들의 사회적 조건의 변
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을 깊이 실망시켰다.
루터는 목숨을 걸고 튀링겐의 반도들과 접촉을 시도한 뒤, [범죄적이고 약탈적
인 농민집단을 반대함]이라는 맹렬한 비방문을 작성하였다. 이 비방문은 시골 주
민들 가운데 그를 지지했던 수많은 민중들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주들 편에서 그에 대한 신망이 커져갔다.
농민 봉기 그에게 가져온 염려에서 해방되자, 루터는 환속한 수녀 카드린 폰
보라와 결혼한 후, 1525년 말, 에라스무스 쪽을 향하여 그와 그의 찬미자들 모두
를 거부한다고 통고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카톨릭의 압력에 의해 1524년 [자유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라는
글을 출간하여 루터를 공박했다. 이에 루터는 [노예 의지론]에서 응전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과 [오직 은혜로만]의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인
간의 죄의 심각성을 들춰냈다.
이처럼 1522년에서 1525년까지 "자신의" 복음에 충실하였던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국가(민족)적 자유, 정치적 자유, 그리고 자유의지와 혼동시키기를 거부
했다. 그는 이 세번에 걸친 거부를 통해 기사들의 민족주의, 농민들의 "사회중
의" 그리고 기독교 인문주의와 결별을 한 것이다.
3. 복음의 파급과 변호
농민 전쟁이 끝나자 게오르그 폰 작센은 농민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고 국가들
의 힘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부와 북부 독일의 여러 군주들을 데쏘동맹에 집합시
켰다.
1526년에 이 데쏘 동맹에 토르고 또는 고타 동맹이 맞섰다. 토르고 동맹의 회
원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수호하는데 심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또한 그들은 그때
까지 불규칙적이었던 복음 신앙 전파에 질서를 세워야 할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조직을 위한 노력을 루터는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
무리 그가 군주들의 보호하에서 복음주의 교회들의 창설 문제에 망설이며 신중을
기하긴 했지만 결국 농민 폭동 때 교훈을 받아 자기의 힘있는 보호자들의 간청에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복음 메시지의 설교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세속 당국
에 의뢰했던 이 결정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1525년 이전에는 자체의 힘으로
전개되던 "자생적 민중 운동"이었던 종교개혁이 농민 전쟁을 치루면서부터 군주
들의 일거리가 되었고, 남부와 서남부에서는 도시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복음주의 교회 조직의 첫 시도는 1526년 10월 홈베르크 대회 이후, 수도사였던
아비뇽의 랑베르의 도움으로 필립 폰 헤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교
회 조직은 루터가 시기 상조요 신중치 못한 것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헤세 지방에선 적용되지 못했다. 종교개혁에 가담한 군주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루터의 제안을 고려했다. 다시말해 그들은 그들 국가들에서
복음의 이상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감찰에 의지한 것이다. 첫 감찰이 실시되자
많은 교회 성직자들의 영적 비참함이 드러났고, 따라서 그들의 양무리들의 종교
적 비탄이 들춰졌다. 멜란히톤은 그들을 위해 교육서들을 작성했고 루터도 이들
을 염두에 두고 1529년 [대.소 교리문답]을 작성했다.
1526년 프랑소아 1세는 칼 5세와 싸우기 위해서 교황 클레멘트 7세와 제휴했
다. 그러자 황제는 토르고 동맹의 구성을 허용해야 했고, 슈파이어 국회에서
(1526년 6월) 보름스 칙령의 적용 요구를 거부하고 새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교
의 모든 자유를 군주들에게 허용할 것을 채택해야 했다.
이렇게 일시적 휴전이 체결됨으로 개신교 군주들은 "새" 복음 확산에 상당히
봉사를 했으나 이 휴전은 1529년 4월 슈파이어 2차 국회시, 매우 위협을 받게 되
었다. 칼 5세는 보름스 칙령의 적용 뿐만 아니라, 차기 공의회까지 종교개혁의
확장을 중지할 것과 복음에 가담한 영토내의 카톨릭 예배 허용을 요구하였다. 국
회의 참여자들은 대다수가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황제의 결정에 박수를 보
냈다. 소수의 복음주의자들은 3년 전 슈파이어 국회에서 부여받은 자유를 위반하
는 이 결정에 대해 항의했다(이 항의라는 말에서 종교개혁의 가담한 이들에게
<프로테스탄트>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 개신교 소수 가운데 군주들과 독일 고지대의 대표들이 있었지만 황제와 카
톨릭 국가들의 세력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필립 폰 헤세의 선동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은 비텐베르크와 독일 고지대 사이에 존재하는 교리적 차이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는 츠빙글리 및 스위스 프로테스탄트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년 전부터 성찬
에 대한 견해로 츠빙글리와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립 폰 헤세가 교리적 상호이해를 통해 카톨릭 세력에 저항할 수 있
는 개신교 동맹을 준비하려는 열망에서 1529년에 독일과 스위스 신학자들을 마르
부르크에 소집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양측은 논쟁 대결을 벌렸다. 그러나
3일간의 힘든 대화 끝에, 두 파는 서로 용납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헤
어졌다.
마르부르크 회담의 실패는 필립 폰 헤세의 계획을 돕지 못했다. 오히려 더 상
황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칼 5세는 1530년 여름 내내 아우그르부르크에 국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스위스인들은 국회에 참석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빙
글리는 취리히에서 높이 평가되는 교리 설명서를 [황제에게 드리는 신앙의 지침]
이라는 표제를 붙여 황제에게 보냈다. 한편 독일 고지데 도시들에서는 고유의 신
앙고서인 [4도시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작센이나 헤센같은 독일 지방
국가들은 루터 대신에 멜란히톤을 그들의 해설자로 삼았다. 멜란히톤은 슈바바흐
헌장에서 영감을 받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신앙고백서를 작성했
다.
이처럼 평화적이고 능숙한 기교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우그스부르크 신앙
고백서는 국회에 참석했던 가톨릭 국가들의 대표자들의 눈에 호의롭게 보이지 못
했다. 그들은 엑크를 시켜 멜란히톤에게 응전을 하여 [카톨릭 논박]이 나오게 되
었는데 이것을 칼 5세가 수정하여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옹호했고 칼 5세는 거
부함으로 끝났다. 황제는 1530년 11월 19일 국회를 끝내면서, 프로테스탄트들에
게 1531년 4월 15일 이전에 로마에 굴복하라고 경고했다.
위험에 직면한 복음주의 군주들과 종교개혁에 가담한 독일 고지대 도시들은 필
립 폰 헤센과 작센의 요한의 지휘하에 서로의 동맹을 꾀화여 1531년에 슈말칼덴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황제는 개신교와 타협하여 1532년 7월
23일에 누렘베르크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4. 루터주의의 투쟁과 확립
누렘베르크 휴전 조약이 체결되던 때, 이미 독일 내부에 깊이 심어진 종교개혁
은 유럽의 북부와 동부에 뻗어나가 있었다.
종교개혁이 전진을 계속하는 동안 조명주의가 다시 이번엔 화란과 독일 저지대
에 모습을 보였다. 멜키오르 호프만이라는 수아브 모피상인이 앞장섰는데, 사람
들은 자주 재세례파라는 칭호를 주었다. 호프만은 자신이 받았다는 계시에 항상
빠져 복음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 그는 세상의 종말을 1533년으로 예언하고 스
트라스부르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스트라스부르
당국에 의해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멜기오르파는 호프만이 투옥되자, 요한 마티스를 새 영적 지도자로 삼
아 뮌스터가 예언들이 실현될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몰려 들
었고 이들은 지배 계급에 불만을 품고 있던 직공들의 협력으로 권력을 탈취했다.
그러나 뮌스터의 주교가 도시를 공격했을 때, 열광적으로 저항했다. 1534년 부활
절에 마티스가 탈출하다 살해당하였고, 1535년 6월 24일 밤중에 한 배신자가 도
시의 문을 포위군에게 열어주어 주교와 군주의 연합군이 들어와 조명파들의 "공
산주의 신정정치"를 종식시켰다.
뮌스터의 참변은 카톨릭이 보기에 비테베르크 운동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로 보
였으며, 또한 로마에 충실한 제국가들에게 "새" 신앙에 대한 적대감을 야기시키
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들과 뮌스터의 예언자들과는 전
혀 공통된 점이 없음을 지적하였고, 루터는 1536년에 [세속 당국이 재세례파들을
육체적 형벌로 맞서야 할 의무]라는 논문을 쓰고, 칼뱅도 [왕께 드리는 서한]을
작성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복음의 가담자들이 폭도도 혁신자들도 아님을 보이려
했다.
스트라스부쳐의 개혁자인 마틴 부쳐의 성찬의 문제를 위한 수고는 비텐베르크
협약으로 까지 나아갔고, 루터주의의 영향력을 독일 고지대에 더욱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1539년 종교개혁에 가담한 두개의 또다른 국가들이 합류하였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로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사실 로마는 프로
테스탄트들의 갈망에 진정으로 응답해 주거나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폴 3세는 1537년 만토바에 공의회를 소집함으로서 보다
호의롭게 보였지만 개신교 제국가들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로 별다른 성과가 없었
다.
개신교 제국가들이 슈말칼덴에서 보여준 강경태도는 가톨릭 제국가들로 하여금
1538년 "방어동맹"인 누렘베르크 동맹을 결성케 했다. 그러나 황제는 1539년 프
랑크푸르트 휴전 조약 체결을 하여 신학적 대화를 통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
을 장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540년과 1541년 사이에 아그노,보름스, 라티스
본 회담들이 열렸다. 그러나 어떤 일치된 협약에 도달하지 못한채 회담들은 실패
로 돌아갔고, 이로인해 독일은 두파로 계속 분열되어 긴장된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540년 개신교의 참피온인 필립 폰 헤세가 중혼을 함으로서 이 균형은
깨어지고 만다. 그는 황제 앞에서 1541년 6월 13일 슈말칼덴 동맹에 더이상 새
회원을 받지 않고, 또 외국 세력과 협정을 체결치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속죄하였다. 1543년 칼 5세는 영토을 확장을 하였고, 이때 프로테스탄트
제 국가들이 보여준 머뭇거림은 결과적으로 라인강 유역 지방에 종교 개혁을 확
립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칼 5세는 여기에 만족치 못하고 개신교파를 분열시키고 종교개혁에 가
담한 국가들을 끝내기 위하여 교황 폴 3세로부터 트렌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할 것
을 약속 받아 1545년 3월 15일로 개회 날자를 정하고 소집을 하였다.
개신교의 참여를 바라지 않는 황제의 계산대로 개신교도들은 트렌트 회의를 인
정하지 않고 거부하였다. 이에 칼 5세는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을 터뜨려 슈말칼
덴 동맹에 가담한 국가들을 처벌하고자 하였다. 전투는 결국 슈말칼덴 동맹이 사
라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모리츠 폰 작센이 황제에게 패해 무력해진 개신교 군주들의 선두에 선
독일 개신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아우그스부르크를 점령하고 칼 5세를 인스
브룩크에서 쳐부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이 승리로 인해 독일 개신교는 파사우
조약(1553년)을 통해 개신교들에게 다음 국회소집 때까지 관용을 베풀겠다는 약
정을 얻어냈다. 다음 국회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일어났고, 이 국회는 종
교개혁에 대해 그동안 계속해온 투쟁들을 끝맺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새로운 세력에 의해서 위협을 받았는데
그것은 칼빈주의와 반동 종교개혁이었다. 이 두 세력의 등장으로 독일 내부에서
고유의미에서의 종교개혁 시기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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