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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사본의 발견과 출판신학참고자료 2021. 12. 16. 07:03
사해사본의 발견과 출판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번역자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부딪치게 된다. 1장 “히브리어 본문의 상태”에서 필자는 우리에게 전해진 히브리어 본문에 우연한 실수나 고의적인 본문 변경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성경 번역자는 변경된 본문까지 회복해가면서 번역을 하게 된다는 점을 밝혔다.
구약성경 번역의 대본이 되는 히브리어 본문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마소라 본문」을 일컫는 것이다. 비록 「마소라 본문」의 전신이었던 「전(前)마소라 본문」이 기원전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기원후 7세기이므로, 「마소라 본문」이 확정되기 이전에 나온 고대의 히브리어 사본과 고대의 번역본들은 「마소라 본문」 가운데 변경된 본문을 회복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고대의 히브리어 사본으로는 「사마리아 오경」과 「사해사본」이 있고, 고대 번역본들로는 그리스어역 「칠십인역」, 시리아역 「페시타」, 아람어역 「타르굼」, 라틴어역 「불가타」 등이 있다.
이제 히브리어 사본인 「사해사본」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해사본」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현지에서 들을 수 있는 「사해사본」 발견에 얽힌 이야기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해사본」 박물관 설립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사해사본」의 출판에 관한 소식도 전하고자 한다.
1. 「사해사본」의 발견
1947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에서 “유대 광야 두루마리” 혹은 “사해 두루마리”로 불리는 구약성경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모두 열 한 개의 동굴에서 「에스더기」만을 제외하고 구약성경에 속한 모든 책들의 옛 사본들이 여러 종류 발견되었다. 거기에서 발견된 여러 종류의 사본들은 현존하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보다 천년 이상이나 더 옛 것일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본문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성경 본문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대 광야 두루마리의 발견은 20세기에 발견된 다른 어느 고고학적 발견보다도 성서학계에 커다란 흥미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뉴욕 타임」지는 에드문드 윌슨의 「사해 두루마리」가 1956년 미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58년 4월 15일자 「뉴욕 타임」지는 사해 두루마리 발견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1959년에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회가 「신학논단(神學論壇)」 제 5집에서 사해사본을 특집으로 다뤘던 일이 있다. 그후 연세대학교 민영규 교수의 “예루살렘 입성기” 중에서 무려 10회(21회부터 30회까지)를 “사해문서의 쿰란 유적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일이 있다.
「그말씀」 1993년 2월호에서는 화보를 통하여, 사해사본이 담겼던 항아리와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두루마리, 사해사본이 발견된 동굴 가운데 제 4,5 동굴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1947년 겨울의 그 엄청난 발견은 사실 우연이었다.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는 근 2천여 년 동안, 지금까지 아무도 정착해본 적이 없는 불모지이다. 다만 아랍 유목민들(베두인)이 계절을 따라 옮겨 다니는 황량한 들판이다. 아랍 유목민의 한 목동 무하마드 아드-디브(Muhammad Adh-Dhib, 아드-디브는 ‘늑대'라는 뜻임)는 자기가 먹이던 양떼 중에서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잃은 양을 찾아 계곡을 뒤졌다. 어느 한 계곡에 왔을 때 벼랑 위로 조그마한 동굴 입구가 보였다.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작고, 광야의 들귀신들이나 드나들 듯한 음산한 굴이었다. 사해 부근의 유대 광야에는 이런 굴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소년은 혹시 들짐승이나 있으면 어쩌나 해서 돌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동굴 안에서 단지가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돌을 던져보았다. 여전히 똑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무엇인가가 저 굴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드디어 그가 굴 속에서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사본들이었다.
1) 이사야서 사본 1QIsaa (1-66장)
2) 이사야서 사본 1QIsab (주로 38-66장 부분)
3) 하박국서 주석
4) 훈련 교본(the Manual of Discipline)
5)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
6) 감사 찬송
7) 외경 창세기
이것들 중 성경 사본들은 오늘날의 「마소라 본문」보다 천년이나 더 오래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으나, 그 목동으로서는 단지에 담겨져 있던 그 가죽 두루마리의 비밀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큰 수입을 잡을 수 있는 가죽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만이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중 일부를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두 수선공 칸도(Kando)에게 보였다. 그의 본명은 카릴 이스칸더 샤힌(Khail Iskander Shahin)이지만 현지에서는 그를 칸도라고 부른다. 칸도는 시리아 정통교회 교인이었고, 무하마드 아드-디브보다는 유식했던 것 같다. 칸도의 눈에는 그 가죽이 단순한 가죽이 아니라, 글씨가 쓰여 있는 만큼, 단순한 가죽 이상의 가치를 가진 어떤 경전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사본 두루마리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시리아 정통 교회의 대감독(Metropolitan)이던 아타나시우스 예수 사무엘(Athanasius Yeshue Samuel)에게 보냈다(이렇게 해서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 중 위의 1,3,4,7 두루마리가 몇 차례에 걸쳐 그에게로 넘어갔다).
사무엘 대감독 역시 성서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해독하거나 연대를 추정하거나 그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본들이 히브리어 성경사본이라는 것과, 그것들이 발견된 곳이 지난 이천 여년 동안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 사본의 연대가 고대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는 점에 재빨리 착안하였다.
한편 다른 경로를 통해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나머지 두루마리들의 일부가 1948년 당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과의 엘리에제르 립파 수케닉(Eliezer Lipa Sukenik)교수의 손으로 들어갔다(쿰란 제 1동굴의 것으로서는 2,5,6 두루마리). 수케닉 교수가 그 사본들을 입수하기까지 겪은 우여곡절은 유명하다.
두루마리의 단편만 검토해 보고서도 그 두루마리의 참 가치에 놀란 수케닉 교수는 그런 사본들이 베들레헴에 더 많이 도착되었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지척에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당시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고 베들레헴은 적지였기 때문에 그리로 여행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케닉 교수는 ‘하가나’(이스라엘 국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그의 아들 이갈 야딘(Yigael Yadin)장군과 이 일을 상의하였다. 이갈 야딘 장군은 이미 고고학자로도 인정받고 있던 학자였다. 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과 교수가 된 인물이다. 이갈 야딘 교수는 그때를 이같이 회고하고 있다.
제 부친께서는 그 두루마리들을 보시러 베들레헴으로 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전선을 거쳐야 되는데, 한 민간인이 물건을 가지러 전선을 뚫고 적 진지로 들어간다고 할 때 그것을 허락할 군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처음에 저는 군사령관으로서 그 일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친과 저는 고고학자입니다. 그 기막힌 물건(사해사본 두루마리)이 지척인 베들레헴에 있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제 부친께 꼭 가셔서 그것을 가져 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들된 도리로서는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제가 잘 엄호를 해드릴테니 다녀오시라고 했지요.
결국 수케닉 교수는 베들레헴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구두 수선공 칸도를 만나 나머지 두루마리를 입수하였다. 그러나 그때 수케닉 교수는 도굴한 유물을 불법적으로 사들인 것이 위법행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 수사 당국으로부터의 추궁이 두려워서, 그는 사들인 사본들 중에서 일부를 칸도의 집 뒤뜰에 묻고 일부만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두 주일 후 수케닉 교수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가서 파묻은 단지를 꺼냈다. 단지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는 시커멓게 썩은 가죽이 악취만 풍기고 있었으며 이미 사본은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해발 마이너스 300미터의 쿰란 광야에서는 이천년을 견뎌온 가죽 두루마리가 해발 800미터의 베들레헴에서는 단 두 주일을 못 견뎌 썩고 말았던 것이다.
2. 「사해사본」 박물관
기원전 200년 경의 성경사본을 포함한 네 벌의 사해 두루마리를 팝니다. 수익금은 본 교단(시리아 정통교회)의 기독교 교육 및 선교기금이 될 것이며, 이 일에 단체나 개인의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1954년 6월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지 광고란에 나왔던 사해사본 경매 광고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네 벌의 사해 두루마리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나온 일곱 벌의 두루마리 중 시리아 정통교회의 대감독이 가지고 있던 「이사야서 사본 1QIsaa」, 「하박국서 주석」, 「훈련교본」, 「외경 창세기」 등을 말한다.
같은 동굴에서 발견된 것들 중 다른 세 벌의 두루마리인 「이사야서 사본 1QIsab」,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 「감사 찬송」 등은 히브리 대학교의 수케닉 교수가 가지고 있었다. 수케닉 교수가 기자 회견에서 쿰란 제1동굴에서 나온 이사야 사본들이 기원전 1-2세기의 것들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중 가장 오래된 성경사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전세계에 밝힌 것은 1948년 12월 31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시리아 정통 교회의 사무엘 대감독은 육감으로나마 자기가 입수한 네 벌의 두루마리가 굉장한 보물일 것이라고 믿어 왔는데 수케닉 교수의 그 발표가 있자 이젠 더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이 거부가 된 것이었다. 그 두루마리들이 세계적 보물로 확인되었으니 이제는 부르는 것이 값이 될 것은 확연했다. 사무엘 대감독은 전쟁이 많은 팔레스틴에 이 귀중한 보물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언제 불타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구실로 그것들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아타나시우스 예수 사무엘 대감독이 시리아 정통 최고의 권좌를 버리고 네 벌의 두루마리를 몰래 숨겨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 예루살렘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것이 1949년 1월이었다.
벌써부터 사진 복사판을 펴내 학계에 공개하기를 바랐던 예루살렘의 미국 동방학 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 in Jerusalem)의 학자들은 사무엘 대감독이 이사야서 사본(1QIsaa)이 포함된 네 벌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자 본격적인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사진 복사판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그 이익금은 연구소와 사무엘 대감독과 각각 50퍼센트씩 나누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밀라 버로우스가 편집한 「성 마가 수도원의 사해 두루마리 제1권 이사야서 사본과 하박국서 주석」이다. 출판 비용은 8천불이나 들었고 사무엘 대감독에게 돌아간 이익 배당금은 겨우 3백불이었다.
사무엘 대감독은 그가 가지고 있던 사해 두루마리들을 경매에 붙이기로 작정하였다. 요르단 정부는 팔레스틴의 요르단 영역 안에서 발견된 유물의 불법적 국외 반출에 항의하였다. 히브리 대학교 측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머지 네 벌을 확보하고자 했다. 경매 과정에서 한 때 이사야서 사본 한 벌만도 40만 불까지 말이 났었지만 결국 그 두루마리는 25만 불에 팔렸다. 그것을 산 사람은 수케닉 박사의 아들 이갈 야딘이었다. 민간 재단(American Fund for Israel Institutions)에서 10만불, 이스라엘 정부가 15만 불을 지불했으나, 나중에 사무엘 곳테스만(D.Samuel Gottesman)이라고 하는 뉴욕의 독지가가 25만 불을 기부하여 민간 재단과 이스라엘 정부에 각각 환불하였다. 지금 이스라엘 국립박물관 사해사본실 입구에는 사무엘 곳테스만과 그의 아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실 사무엘 대감독이 그 네 벌의 두루마리를 받고서 구두 수선공 칸도에게 준 것은 겨우 97불 20센트였다. 그 중 32불은 칸도에게, 나머지 65불 20센트는 베두인 소년에게 돌아갔었다.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책의 전당’(the Shrine of the Book)이라고 하는 사해사본 박물관이 있다. 독특한 건축 양식부터가 방문객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킨다. 직육면체의 검은 대리석 벽과 흰 돔을 서로 마주 보게 지은 것은 쿰란공동체의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이라고 하는 그들의 중요한 신학사상을 건축양식을 통해 나타내 보인 것이다. 검은 대리석은 ‘어둠의 자녀’를 가리키고 흰 돔은 ‘빛의 자녀’를 가리킨다고 한다. 검은 대리석이 주는 중압감은 보는 이들에게 2천년 이상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짓눌렀던 박해를 상기시킨다. 지상으로 보이는 흰 돔은 지붕이고 박물관 자체는 지하에 들어 있다. 검은 대리석 벽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으며 입구에서 사해사본실까지 이르는 지하 통로는 무등변 사변형 아치들이 서로 엇갈리게 연속되어 있어서 마치 본래 그 사본들이 보관되어 있던 동굴을 실감케 한다. 실내 온도와 습도는 항상 일정하도록 조절되어 있어서 진열된 사본의 부패를 방지하고 있다.
사해사본실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커다란 단지 안에 들어 간 기분을 느끼게 된다. 땅 위로 솟은 흰 돔의 모양은 바로 사본이 들어 있던 단지의 뚜껑을 모방한 것이고 실내의 단순한 내부 구조는 바로 그 단지 속을 본뜬 것이다. 중앙에 높이 솟은 손잡이 모양의 꼭지가 달린 커다란 원기둥은 그 단지 속에 들어 있던 사해 두루마리 모양을 확대시킨 것이다. 그 원기둥의 윗 부분에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 사본을 실물 크기로 복사하여 붙여 놓았다. 실내 벽으로는 들어가면서 「훈련교본」, 「하박국서 주석」, 「감사찬송」 등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 실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3. 발견된 구약사본들
에스더기를 제외한 구약의 모든 책이 다 발견되었다. 발견된 구약사본 총목록은 젤린-포러의 「구약성서 개론」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단편’뿐이다. 여기서 ‘단편’이라 함은 두루마리 사본의 조각을 뜻한다.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첫째 사본(1QIsaa) 하나만이 1-6장까지 다 들어 있는 완전한 형태의 두루마리이다. 그 외에는 불완전한 형태의 두루마리이거나 단편들이다. 예를 들면, 제 4동굴에서 발견된 예레미야 7-22장(4QJer)은 7장부터 22장까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 조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사해 두루마리의 인쇄본들은 다음과 같다.
1950년에 버로우스(M.Burrows)가 트레버(J.C.Trever)와 브로운리(W.H. Brownlee)의 도움을 받아 「성 마가 수도원의 사해 두루마리(The Dead Sea Scrolls of St.Mark's Monastery)」를 두 권으로 편찬해 냈다. 1권에서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첫째 사본(1QIsaa」과 「하박국서 주석(1QpHab)」의 사진판과 해독판을 보여주고 있다.
1954년에 이갈 야딘(Y. Yadin) 교수는 그의 아버지 엘리에제르 수케닉 교수가 생전에 출판했던, 「감추어졌던 두루마리(Megilloth Genusoth)」, I(1948),II(1950)를 보강하여 「감추어졌던 두루마리 보물 (Osar Hamegilloth Hagenusoth)」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서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둘째 사본(1QIsab)」과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1QM)」과 「감사찬양시(1QH)」가 들어 있다. 이것의 영어 번역판 「The Dead Sea Scrolls of the Hebrew University」이 1955년에 나왔다.
1955년부터 「유대 광야 발견물(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이하 DJD) 총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르텔레미(D. Barthelemy)가 펴낸 「유대 광야의 발견물 제1권: 쿰란 제 1동굴」(1955)에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곧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 사사기, 이사야, 에스겔 등의 사본 단편들의 사진판, 해독판, 주해 등이 들어 있다.
1960년에는 브루아(P.Beroit)와 밀리크(J.T.Milik)와 롤랑 드보(R.de Vaux)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2권: 무라바아트 동굴 (DJD,II: Les Grotlesde Murabbaat)」가 나왔다. 무라바아트에서는 성경 밖의 문헌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성경본문 자료로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이사야 등의 단편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본들의 사진판, 해독판, 설명 등을 볼 수 있다.
1962년에는 빌레(M.Billet)와 밀리크(J.T.Milik)와 롤랑 드보(R.de.Vaux)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3권: 쿰란의 여러 동굴에서 나온 사본들(DJD,III: Les “Petites Grottes” de Qumran)」이 나왔다. 여기에는 쿰란 제 2동굴, 제 3동굴, 제 6동굴, 제 7동굴, 제 10동굴에서 발견된 구약 각 책의 여러 사본들과 성경 밖의 여러 문헌 사본들의 사진판과 해독판, 해설이 들어 있다.
1965년에는 샌더스(J.A.Sanders)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4권: 쿰란 제 11동굴의 시편 두루마리(DJD,IV: The Psalms Scroll of Qumran Cave 11)」가 출판되었다.
1968년에는 알레그로(J.M.Allegro)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5권: 쿰란 제 4동굴(DJD,V: Qumran Cave 4: I(4Q 158-186)」이 나왔다. 여기에는 이사야서 주석, 호세아서 주석, 나훔서 주석, 스바냐서 주석, 시편 주석, 애가 본문 등이 포함된 여러 문헌의 사진판, 해독판, 설명 등이 들어 있다.
1971년에는 쿰란 제 11동굴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이 출판되었다(J.P.M. van der Ploeg, A.S.van der Wounde,Le Targ de Job de la grotte XI de Qumran).
1977년에는 토브(E.Tov)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6권: 쿰란 제 4동굴(DJD,VI: Qumran Grotte 4,II, 1.Archeologie, 2.Tefillin, Mezuzat et Targums(4Q 128-4Q 157)」이 출판되어 나왔다. 여기에서는 쿰란 제 4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인 레위기 타르굼, 욥기 타르굼을 볼 수 있다. 「유대 광야 발견물」 총서는 아직도 완간되지는 않았으나 지난 15년 동안 다른 새로운 편집이 출판되지 않고 있다.
구약 밖의 본문으로는, 1956년에 아비가드(N. Avigad)와 야딘(Y. Yadin) 편집의 「외경 창세기(A Genesis Apocryphon)」가 나왔다. 1957년에는 묄러(P.Wenberg-Moller)가 편집한 「훈련교본서(The Manual of Discipline)」가 「유대 광야 본문연구(Studies on the Texts of the Desert of Judah」 총서 1권으로 나왔다. 1960년에는 닐센(Svend Holm - Nielsen)의 「호다요트: 쿰란에서 나온 시(Hodayot Psalms from Qumran)」가 나왔고, 1961년에는 같은 「호다요트」가 만수르(Menahem Mansoor) 편집의 「감사찬송(The Thanksgiving Hymms)」으로 나왔다. 이것은 「유대 광야 본문연구」 총서의 제 3권이다. 이 총서는 라이덴의 이 제이 브릴사(E.J.Brill)에서 나온 것으로서 모두 9권으로 되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제1권과 제3권은 발견된 문헌의 본문 자체를 번역하고, 주석을 단 것이다. 벤 치온 봐콜더(Ben Zion Wacholder)와 마틴 아벡(Martin G. Abegg) 편집의 「미간행 사해 두루마리: 쿰란 제 4동굴의 아람어본문 예비편집(A Preliminary Edition of the Aramaic Texts from Qumran Cave Four)」은 「다마스쿠스 계약」(일명 「사독문서」)과 「엣센파 달력」의 해독 판이다.
1992년에는 ‘사해 두루마리 사본 기금’(Dead Sea scrolls Foundation)이 새롭게 구성되어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나머지 사본들에 대한 편집과 출판 계획이 세워지고 있으며, 1992년 11월 22일에 샌프란시스코 성서학회 총회에서 자문 위원회의 첫번 모임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이 제이 브릴 출판사에서는 1993년에 토브(E.Tov)가 편집한 「사해 두루마리 마이크로피시(The Dead Sea Scrolls on Microfiche)」가 나온다. 1947년에 사해 두루마리들이 발견, 발굴되기 시작한 이래 지난 40년 동안 많은 사본들이 공개되었는데, 이번 마이크로피시에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포함될지는 몰라도 예고한 내용을 보면 쿰란에서 발굴된 것을 위시하여 와디 에드 - 달리예, 와디 무라바이트, 키르벳 미르트, 나할 헤베르, 마사다 등에서 발굴된 두루마리를 포함할 것이라고 한다. 사해 두루마리의 미공개 두루마리의 출판은 구약본문 연구에 더욱 더 밝은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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