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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립얀시의 고통이라는 선물
    목회참고자료/기독교 도서 2021. 11. 14. 22:41

    2부 고통과 함께 일하다

    외과학을 가르치는 일상적인 일에 기분 좋게 정착해 가고 있을 때였다. 나를 인도에 처음으로 불러준 불굴의 스코틀랜드인 로버트 코크런 박사가 나를 자신의 나병 요양소로 초청했고 그것은 나의 일상적인 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코크런 박사가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 질병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나와 누이를 집안에 가두어 두고 나환자들을 치료하시던 그 끔찍한 어린 시절의 광경을 기억했다.

     

    코크런 박사는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불그스레한 피부, 온통 희끗희끗한 머리, 그리고 억센 눈썹. 나는 그토록 역동적이고, 자신감 넘치며, 근면한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는 수천 명의 환자가 수용되어 있는 칭글풋의 요양소에서 행해지는 수술들을 날마다 감독하는 일 외에 벨로어 의과 대학의 임시 책임자로도 봉사했다. 그리고 인도 전역을 위한 정부의 나병 대책 프로그램을 주도해 나갔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에도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고, 성경 공부하는 한두 시간 쉬는 게 고작이었다.

     

    코크런의 나병과의 전쟁은 그 핵심이 종교적 성전(聖戰)이었다. 그는 나는 기독교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어.”라고 말하곤 했다. 나병 환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문화적 금기를 깨뜨리신 예수님의 본을 인용하면서, 그는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오명에 대항해 나병 퇴치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술폰제를 들여와 인도에서 사용하여 처음으로 나병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최초로 나환자들에게 병을 억제할 수 있다는 진정한 희망을 불어넣었고, 심지어 치료에 대한 희망까지도 주었다.

     

    내가 칭글풋에 있는 코크런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는 1947년 따사롭고 맑은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그늘진 오솔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을 때, 그는 나병에 대해 많은 사실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요양소에서 이런저런 나병환자들을 돌아보는 동안 이 환자들에게는 기능을 할 수 있는 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박사님, 이 환자들이 어떤 형태로든 살아가려면 손이 필요할 것 아닙니까? 무언가가 조직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저 손들이 없어져 버리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피부과 전문의요. 그러나 정형외과 의사들 가운데는 이 병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이 아무도 없소. 이 병이 소아마비나 어떤 다른 질병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불구로 만드는데도 말이오.”

     

    나는 그곳에서 나환자의 갈고리 손을 가진 한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그 환자의 손을 진찰해 보고 너무나 놀랍게도 손가락들이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것을 알았다. 관절염이나 다른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뻣뻣해진 손가락들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손가락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 펴게 한 다음 그의 구부러진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들 속에 내 손을 넣고 있는 힘을 다해 꽉 쥐어 보라고 말했다. 거의 마비된 근육에서 나오는 힘으로 인한 가벼운 아픔만을 예상한 나는 내 손에 전달된 갑작스런 고통을 느끼고 소스라칠 듯이 놀랐다. 이 사람의 손아귀 힘은 보디빌딩 선수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 나는 너무 아파서 소리쳤다. 그 사람을 쳐다보니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순간 고통 이상의 것을 느꼈다. 작은 전기 충격 같은 갑작스런 깨달음이 있었다. 끝없이 긴 연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나는 직관적으로 나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놓는 길을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치료를 받기 위해 아우성치는 수많은 손들을 보면서 나는 매우 우울한 아침을 보내던 차였다. 손을 사랑하는 외과 의사로서, 나는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슬픔에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손이 영원히 망가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한 사람의 손아귀 힘을 통해 쓸모 없는손 이면에, 살아 있고 힘있는 근육이 숨겨져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얻었다. 마비라고? 그가 쥐던 손은 아직도 아팠다. 그 사람의 놀라던 표정은 또 하나의 신비였다. 내가 소리를 지를 때까지 그는 자기가 나를 아프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에게는 손으로 무엇을 만진다는 촉감이 없었다.

     

    이후로 나는 나병환자 시체를 해부해 볼 기회를 얻어 근육과 뼈 신경 등의 조직을 관찰하면서 다시 한 번 힘과 열정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죽음의 헛간이라고 불렀던 영안실에서 마지막 해부를 마친 후 마침내 우리가 해답을 찾았을 때, 그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병 간균은 그것이 증식하기 위해 더 시원한 온도를 선호하며 그곳은 대부분이 표피에서 가까운 곳이다. 신체의 면역 체계는 안에 떼를 지어 모여 있는 대식 세포들과 임파구들을 파견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신경을 격리하는 덮개 안에서 부풀어오르고 아주 중요한 자양분을 막아 버린다. 우리는 질식할 것 같던 그 영안실의 깜박이던 불빛 아래서 발견한 것에 대해 그때는 충분히 감사하지 못했으나 그 일을 통해 나는 갈고리 손 복원 수술의 시도를 도저히 늦출 수 없었다. 나병의 영향을 받지 않은 좋은근육의 힘을 이식함으로써 꼬부라진 갈고리 손의 손가락을 펴 주고 손상된 손에 운동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벨로어 병원 측에 그런 수술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했을 때 장애물이 나타났다. 심지어 우리의 노력을 지지하던 직원들까지도 나환자들을 우리 병원에 입원시키는 방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수없이 많은 로비를 한 끝에, 병원에서는 손 연구소를 개원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우리는 감히 나병이라는 말은 사용하지도 못했다. 연구소는 병원 부지 바깥쪽 벽에 붙어 있는 진흙 벽으로 된 창고 안에 개설되었다. 그 즉시 나환자들이 우리 진료소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떤 도움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당한 곤경에 대해 아무런 분노나 적개심이 없는 그들을 보고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었다. 나는 그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아서 자신들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스러웠다.

     

    나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편견이나 두려움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환자들은 정말 끔찍하게 곪은 상처들을 치료해 달라고 내밀었다. 종종 코를 찌르는 고름 냄새와 썩는 냄새가 창고를 가득 메웠다. 당시 나는 나병과 씨름하며 일하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감염을 걱정했다.

     

    나는 내 두 손의 지도를 그려두기 시작했고, 수술 도중에 우연히 바늘이나 날카로운 뼈끝에 손을 찔리면 그때마다 거기에 찔린 곳을 표시했다. 치료하던 환자의 이름과 수술 시간을 적어 둠으로써, 내가 나병에 걸릴 경우 그 원천을 추적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찔리고 베이고 긁힌 자국들이 열세 개에 달하면서 나는 그 방법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아내 마거릿은 내가 나병과 가까이 접촉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앞장서 도와주었다. 어느 주말 내가 집에 없었을 때, 인력거 한 대가 벨로아의 의과 대학 구내에 있는 우리 집 앞에 멈추어 섰다. 이십대 초반인 야윈 남자가 인력거에서 내렸고, 마거릿이 나가서 그를 맞았다. 아내가 보니 그의 구두 앞쪽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의 두 발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또 하얀 흉터가 한쪽 눈언저리를 거의 대부분 덮고 있었고, 그는 강렬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눈을 계속 내리깔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부인.” 그는 매우 공손하게 말했다. “폴 브랜드 박사님 좀 만나 뵐까 해서 왔는데요.” 마거릿은 남편인 브랜드 박사가 사흘 후인 화요일에야 돌아온다고 말해 주었다. 맥이 풀린 그는 아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가 타고 온 인력거가 이미 떠나 버린 후라, 그 사람은 절름거리는 불편한 걸음걸이로 시내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금 같은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나의 아내는 궁핍한 사람을 돕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는 다시 그 사람을 불러서 물었다. “갈 곳은 있는 거죠?” 그 청년이 입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한참만에 마거릿은 가까스로 그 청년, 새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배척과 학대의 대상인 나병환자에게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이야기였다.

     

    그가 처음으로 피부 반점들을 발견한 것은 여덟 살 때였다. 학교에서 쫓겨난 후 그는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이전의 친구들도 길에서 마주치면 일부러 피해 갔다. 음식점이나 상점들도 그를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한 후 그는 마침내 자기를 받아 주는 미션 스쿨을 발견했다. 그러나 졸업장을 받고 나자 아무도 그를 고용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있는 돈을 모두 긁어모아 가까스로 벨로어까지 오는 기차 삯을 마련했다. 그러나 일단 벨로어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버스들이 그를 태워 주지 않았다. 그래서 새던은 남아 있던 돈을 다 털어 인력거를 빌려 타고 의과 대학까지 6km 이상을 달려왔다. 정말이지 그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설령 호텔에서 그를 받아준다 해도 방 값을 낼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순간적으로, 마거릿은 새던에게 우리 베란다에서 지내라고 권했다. 아내는 그를 위해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그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사흘 밤을 거기서 보냈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이들이 내게 달려와서 우리의 새로운 손님인 나병에 걸린 그 훌륭한 청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을 때, 좋은 반응을 보이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곧 나의 아이들도 그 병에 노출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마거릿은 단 한마디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하지만 여보, 갈 데가 없다잖아요."

     

    잠시 후 아내는 내게 그날 아침에 읽은 신약 성경 구절을 이야기해 주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25: 35-36). 아내는 그런 마음으로 새던을 우리 집에 들어오게 한 것이다.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내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결정이었다. 새던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지나친 두려움을 깨닫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 무렵 물리 치료사인 루스 도마라는 여자 선교사도 내게 두려움의 모든 장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모택동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인해 최근에 빠져나온 사람이었다. 원래 그녀는 일단 홍콩으로 나온 후 거기서 다시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차표를 예약했었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 그녀는 인도에 있는 한 정형외과 의사가 나환자들을 데리고 실험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즉시 그녀는 일정을 바꾸어 벨로어로 왔다. 루스는 우리 진료소에 물리 치료소를 설치했다. 그녀는 나환자들을 돌보는 세계 최초의 물리 치료사들 중 하나였고 그 분야의 개척자였다.

     

    루스는 손으로 나환자의 손을 힘차게 마사지하면 손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래서 매일 그녀는 구석에 앉아 나환자들의 손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루스, 그렇게 하면 살갗과 살갗이 너무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됩니다!" 내가 그녀에게 경고했다. "장갑을 끼고 해야 할 거예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나환자의 손을 어루만지곤 했다. 루스 도마는 그 같은 간단한 치료법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그 성공이 어떤 마사지 기술 덕분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접촉이라는 그녀의 은사 덕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와이에 있는 벨기에인 사제 다미앵 신부는, 어느 날 아침 면도를 하다가 뜨거운 물 컵을 발에 쏟았으나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을 알고서 자신이 분명히 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가 1885년도였다. 나환자 사역자들은 그 병이 고통의 신호들을 잠잠하게 해, 환자들이 상처 입기 쉽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처럼 오래 전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환자들과 의료진은 나병이 직접적으로 훨씬 더 나쁜 손상을 일으킨다고 믿고 있었다. 나병의 치명적인 면은 살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어 죽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환자들과 함께 지낼수록, 그 병이 어떻게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에 점점 더 의문이 생겼다. 그 후로 몇 년 몇 개월에 걸친 검사 과정을 통해 나는, 지금은 나병에 음성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이 가장 심하게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꿔 말하면, 나병이 치유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조직이 떨어져 나갔다. 나병이 정지 상태에 있는데, 왜 정상적인 조직이 망가지는 것일까?

     

    우리 베란다에서 잠을 자던 점잖은 젊은 친구인 새던이 바로 이런 유형의 본보기였다. 그의 손에 대해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몇 개월 동안 수술과 회복기를 거친 후 그는 점원이자 타자수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발에 시도한 모든 것은 소용이 없는 듯했다. 그는 여러 의사들에게서 두 다리를 무릎 밑으로 자르라는 권고를 받은 후 최후의 보루로 벨로어에 온 것이었다. 두 발은 거의 절반으로 짧아져 있었고, 발가락 없이 뭉툭하게 생긴 두 발의 앞부분에는 빨갛게 성난 궤양이 계속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해 보았으나 점점 악화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이 수개월 되풀이되자 새던은 우리에게 자기 발에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리를 잘라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새던은 발에 궤양이 생겼는데도 아픈 줄을 몰랐다. 물론 불평할 줄도 몰랐다. 나는 새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새던도 나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기의 마지막 희망으로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다른 의사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다고 말하던 날,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감염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잘라 내는 것 외에 달리 선택할 길이 없어 보였다. 새던은 그 소식을 듣고는 슬퍼했지만 결국 체념했다.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그를 안내해서 병원 복도를 내려가 문까지 걸어갔다. 나는 애써 격려의 말을 생각해 내려고 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절망감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나는 진찰실로 돌아가지 않고 선 채로, 새던이 계단을 내려가서 보도를 건넌 후 큰길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머리와 양 어깨도 절망감으로 축 처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처음으로 무엇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새던은 절뚝거리지 않았다! 나는 방금 그의 뭉툭한 발에 심하게 생긴 농의 상처를 닦아 내느라고 30분이나 소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치료하던 바로 그 부위에 그가 체중을 다 실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상처가 나을 리가 있는가!

    어떻게 지금까지 내가 그 점을 놓칠 수가 있었을까? 젠티아나 바이올렛, 페니실린, 그 외 다른 모든 약이 새던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으므로 그가 무심코 상처 부위의 조직을 계속 파괴시키고 있는 한, 백약이 무효했다. 마침내 나는 상처를 낫지 않게 만드는 장본인을 찾아냈다. 바로, 환자 자신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발에 상처가 있는 환자들에게 상처 난 부위가 땅에 닿지 않도록 애써 훈련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말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손을 치료할 때 깁스를 쓰니까 수술한 상처가 잘 나았던 것을 상기하고 발의 궤양에도 똑같은 방법을 써 보았다. 석고가 충분치 않아 한 번 감은 깁스로 한 달 동안 내버려둬야 했는데, 종종 깁스를 제거할 때 그 냄새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썩은 부분과 고름을 닦아 내면 그 밑에서 건강하게 빛나는 붉은 살결이 드러나곤 했다. 이렇게 딱딱한 깁스 속에서 3-4개월 정도 쉬고 나면 그렇게 끈질기기로 유명한 궤양도 손을 들고 말았다. 나환자들 가운데 수족을 절단하는 환자의 비율이 극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는 나환자 사역에 회의적이었던 병원에 있는 다른 의사들도 이런 결과를 보고 놀라워했다. 그들이 말하던 나쁜 살은 어디로 갔는가?

     

    새던과 같은 환자들을 다루는 일이 고통에 관한 나의 생각에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우리 몸이 손상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 고통의 귀중한 가치임을 오래 전에 인식하고 있었지만 고통이 몸을 미리 보호해 주는 충성스러운 여러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지 못했다. 궤양을 고치는 일은, 이러한 사전 경고 체계가 결여된 사람들에게서 궤양을 예방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간단한 문제였다. 무감각한 발에 반복해서 주어지는 자극의 문제와 싸우기 위해 우리는 구두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부드러운 재료가 필요했다.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마침내 우리는 적절한 결합을 찾아냈다. 그것은 미세한 구멍이 나 있는 고무로 된 구두 밑창과 걷는 동작을 유도하는 활 모양의 탄탄한 가로대, 그리고 주문 제작한 구두 가족 안창 등의 배합이었다. 새던은 그의 뭉뚝한 발에 맞춘 새 구두를 갖게 된 최초의 환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1951, 벨로어는 나환자 치료를 위한 모든 것을 갖춘 병동을 지은 최초의 일반 병원이 되었다. 또한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독립 운동을 벌인 독립 투사이자 인도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인 자가디안 박사가 나환자로서 벨로어에 오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요구사항을 듣고 간디 재단을 통해 벨로어 병원 근처에 있는 큰집을 나환자들을 위한 숙소로 쓰게 했다. 그래서 병원 마당에 있던 거지들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나환자들의 바깥에서의 생활을 준비시켜 주기 위해 접근 방법을 근본적으로 수정해 나갔다. 손과 발에 국한된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 환자의 눈썹, , 눈꺼풀 등의 얼굴 교정을 포함하여 전신을 바라보아야 했다.

     

    나의 나환자 사역은 점차적으로 가르치는 일들과 병원에서의 정형외과 일을 압도했다. 종종 나는 밤에도 나환자들을 생각하느라고 깨어 있었다. 어떤 새로운 외과적 혁신이 그들의 흉터를 줄일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들의 삶의 질을 향상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게 나환자 사역은 점점 부업이 아니라 본업이 되었다.

     

    1952년 나는 록펠러 재단에게서 분에 넘치는 좀 뜻밖의 제안을 하나 받았다. 그 재단의 대표자가 나에게 말했다. “박사님의 나환자 사역은 좋은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계 전역을 다니시면서 가능한 최선의 조언을 구해 오시면 어떻습니까? 비용은 저희 재단에서 지불하겠습니다.” 그 제안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이제 나에게는 세계적 전문가들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어떻게 나병이 신경을 손상하는지에 대해 빛을 비출 수 있는 신경 병리학자들을 찾아갈 수도 있었다. 나는 영국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나의 슬라이드와 표본들을 조심스럽게 꾸려 미국행 여객선에 승선했다.

     

    외과 의사인 내게 그 여행의 핵심은 손 수술의 아버지스털링 버넬 밑에서 연구하며 보낸 캘리포니아에서의 한 달이었다. 거기서 나는 미국 전역에서 단 하나 남아 있는 나병 요양소인 카르빌 공립 보건 병원을 방문했다. 카르빌은 나병에 대한 실험적인 의약 치료법에 있어서 세계를 선도했다. 또한 보스턴에서의 어떤 우연한 만남은 내가 신경 파괴에 대해 이해할 수 없던 비밀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만난 신경학 전문가들 가운데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보여 준 신경 표본들에 대해 똑같이 당황해 했다. 유일한 예외는 바로 데린 데니 브라운 박사였다. 그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보스턴에 있는 한 자선 병원에서 근무하는 훌륭한 신경학자였다. 내가 그 동안 방문했던 의사들은 거의 30분마다 한 번씩 시계를 흘끗 보곤 했다. 그러나 데니 브라운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문제를 제시하자 그의 본능이 뿜어져 나와 그는 시간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진짜 순수한 과학자였다. 그는 무언가를 찾더니 자기가 고양이를 상대로 신경 패턴을 실험하던 일을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데니 브라운이 수년 전에 본 패턴을 생생하게 기억해 내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와 만난 그날 오후는 4개월간의 미국 여행에서 가장 귀중한 시간이었다.

     

    마침내 나는 나병의 전반적인 그림을 짜 맞출 수 있었다. 나병은 일차적으로 신경이 손상되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나병의 간균은 이마나 코 같은 시원한 곳에서 번성하여 신체의 방어 반응을 유발한다. 그런데 그 침입자들은 대개 외관상의 손상을 일으킨다. 하지만 정말로 파괴적인 증상들은 간균이 피부 표면 근처에 침입할 때 일어난다. 각각의 주요 신경은 운동 신경과 감각 섬유의 통로다. 따라서 신경에 이상이 생기면 그 두 가지 모두 영향을 받는다. 운동 신경의 축색돌기들이 더 이상 뇌에서 오는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아 손과 발, 눈꺼풀 등의 근육이 마비된다. 감각 세포의 축색돌기들도 더 이상 촉감, 온도, 통증 따위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기 때문에 환자가 쉽게 상처를 입는다. 상처가 생기면 종종 감염이 시작된다. 그리고 신체 반응으로 뼈가 파괴되거나 흡수되면, 결과적으로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짧아진다. 이제 나는 나병으로 인한 대부분의 기형들과 무서운 증상들은 모두 똑같은 근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바로, 손상된 신경이다.

     

    나는 새로운 수술 기술로 무장하고, 무고통에 대한 우리의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실탄을 장전하여 록펠러 재단이 후원한 여행에서 돌아왔다. 내가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여행하던 바로 그해, 주 정부가 우리에게 의과대학에서 22km 떨어진 카리기리라는 농촌 지역의 부지 약 31만 평을 제공했다. 내가 처음으로 이 메마른 자갈밭을 둘러보면서 느낀 실망감을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내심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렇게 황폐한 곳에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땅을 받아들였고 개간했다. 카리기리는 곧 어니스트 프리취를 외과 과장으로 임명했고 나중에는 의료 원장에 임명했다. 그의 의술뿐 아니라 여러 면으로 보아 현명한 조처였다. 스위스 출신의 농업 선교사이던 프리취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식물학과 생태학의 기본 원리들을 가르쳤다. 프리취는 이제 카리기리에 있는 그 황무지를 자기가 가장 도전해 볼 만한 환자로 받아들여 도랑과 댐을 만들고 토양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뭄에 견딜 수 있는 식물들을 찾아냈으며 우선 자기 집에서 키운 묘목들을 조심스럽게 옮겨 심은 후 1년에 천 그루나 되는 많은 나무를 심었다. 카리기리는 점차 변화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성한 초록색의 숲이 우거져 지상의 기온을 낮춰 주었으며 매서운 바람을 길들여 주었다. 그곳에서는 도시의 열기를 피해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방문하는 일을 학수고대하기 시작했다.

    초기 시절의 카리기리를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사막에서 일어난 일이 자연의 기적처럼 보였다. 그것은 죽음의 환경에서 싹트고 있는 아름다운 오아시스이자 새로운 희망이었다. 나는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환자들에게서 성취하고 싶어하는 것의 상징을 보았다. 우리는 아무런 희망 없이 우리에게 온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정성스럽게 돌보면 땅이 변하듯 그들도 변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몇 해에 걸쳐, 그 상징은 점점 더 현실화되어 갔다.

     

    우리는 카리기리에서 처음으로 세계적인 외과 의사들, 그리고 나병 전문가들과 함께 한 방에 모여 동일한 한 가지 의학적 주제에 초점을 맞춰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영향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손 수술 전문가들은 마비된 손을 수술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흥분했고, 나병 전문가들은 상처 치유와 손상 예방에서 우리가 거둔 놀라운 성공률에 대해 열광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재활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초기 시절, 흙으로 지은 손 진료소에서 일할 때부터 우리가 마음속에 품어 오던 꿈이기도 했다. 이 위원회는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재활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법에 동의하는 공식적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WHO가 나를 자문 위원으로 위촉하였고, 카리기리는 국제적인 나병 전문가들과 WHO의 후원을 받은 모든 신임 훈련생들이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브랜드 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어머니는 여전히 산지에서 활동하셨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가장 도전적인 사례를 몇 가지 가져오셨다. 1년에 두세 차례씩 어머니는 말과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24시간도 더 걸려서 우리를 방문하셨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너무나 비참한 사람들을 대동하고 오셨다. 대개 그들은 거의 굶어서 죽어가는 거지들로 손발이 심하게 마비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없어지고, 손과 발에 상처들이 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께 우리에겐 빈 침상이 없고, 환자들을 선별할 때도 가장 회복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을 기준으로 주의 깊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부드럽게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그래, , 알고 있어. 하지만 이 늙은 어미를 봐서라도 이번만 해다오. 그리고 예수님이 너에게 무슨 일을 원하시는지 기도해 보렴.” 이런 식으로 어머니는 늘 나를 이기셨다. 카리기리에서의 정성스런 보살핌은 종종 이들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마을에서 고용한 사람들인 대다수 직원들은 그들에 대해 몸을 사리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정말 예기치 않게, 나환자 사역은 내 인생의 모든 분산된 힘을 결집해 주었다. 나는 가능한 모든 수술을 다 해보았고, 연구할 수 있는 멋진 실험실도 생겼으며, 지난날 건축업 시절에 배운 기술들이 적절한 때 떠올라 다시 써먹을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소년 십여 명과 함께 앉아 그들에게 회복된 손으로 목공일 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을 때, 나는 그 장면을 어디선가 본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났다. 이전에는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던 그 길로, 하나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분명하고 엄숙한 느낌이 들었다.

     

    환자들의 모든 재활 과정을 추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의학에 대한 나의 접근 태도가 달라졌다. 의사들은 어디선가, 아마 의과 대학일 가능성이 높지만 오만하게 보이는 태도를 몸에 익힌다. 카리기리에서 사역하면서 우리는 그 오만을 벗어던졌다. 우리는 나환자들을 구원할수 없었다. 물론 그 병을 체포하고 어느 정도 손상된 부분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치료한 모든 나환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고, 힘겨운 장애를 딛고 새 생활을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나는 나의 주요 공헌들이 의과 대학에서 공부한 적이 없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자들과 동반자가 되어 상한 영혼에게 존엄성을 회복해 주는 작업이었다. 그것이 재활의 바른 의미였다.

     

    1965, 인도에서 근 20년을 살아온 우리는 이사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숙련된 인도인 직원들이 나환자 사역의 거의 모든 영역을 이미 떠맡았고, 나는 매년 수개월씩 세계 곳곳을 다니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나와 카리기리와의 유대감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이제 6명의 자녀가 생겼고, 그 중 몇 명은 벌써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서 이사할 적절한 시기가 온 것 같았다. 19661월 우리 브랜드 가족은 미국 미시시피 강 제방 옆 병원 부지에 있는 목조 가옥으로 이주했다. 카르빌의 나환자 병원의 책임자로 있던 에드가 존윅 박사의 요청이 있어서였다. 나는 과학적 연구를 하기 정말 좋은 때 미국에 오게 된 것이다.

     

    카르빌에서의 모든 임상 경험을 통해 완전한 그림을 짜 맞추는 데는 수년 동안의 연구가 필요했지만, 결국 나는 이해했다. 카르빌에서 우리의 연구 계획은 우리에게 고통에 주파수를 맞추는훨씬 더 강력한 방법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고통의 이미지를 향상하기 위해 노력할 때, 때로 의심이 생김을 고백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고통을 원수처럼 취급하는 사회에서, 누가 고통의 미덕을 격찬하는 나의 정반대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미국 정부도 이와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다른 곳의 연구원들은 어떻게 하면 고통을 억제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하여, 왜 카르빌의 연구 기금은 고통을 회복하고 고양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가? 1970년대 후반의 긴축 정책은 점차 그런 연구를 정당화하기 힘들게 했고, 미국의 공중 위생 당국은 매년 카르빌의 예산을 세밀히 조사하여, 주로 다른 나라에 있는 나환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연구에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할 여유가 있는지 저울질했다.

     

    이 무렵쯤, 나는 아주 우연히 우리가 카르빌에서 고통에 관해 연구한 것을 새롭게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기초 연구에 대한 우리의 모든 투자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준 사건의 일대 전환이었다. 미국에는 나환자들이 불과 몇 천 명밖에 없지만 당뇨병 환자들은 수백만 명이 넘는다. 우리는 고통에 관한 우리의 아이디어가 그들에게도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느 날 저녁 의료 저널을 훑어보다가, 당뇨병 환자를 위한 정골 요법이라는 글귀를 우연히 발견했다. 포도당 대사에 관한 질병인 당뇨병이 언제부터 뼈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인가? 책장을 넘기니 엑스레이 사진이 실려 있었다. 감각 없는 나환자들의 발에서 일어난 뼈의 변화를 찍은 엑스레이 사진과 아주 똑같았다. 나는 그 기사의 필자인 텍사스에 있는 의사 두 명을 방문해서 그 문제를 놓고 토의했으며, 그 이후 텍사스 남부의 당뇨 클럽에서 강연을 했다. 감각 테스트를 통해 궤양을 갖고 있는 모든 당뇨병 환자들이 나환자들과 똑같은 패턴으로 감각을 상실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외과 의사들은 혈액 공급이 위축된 당뇨병 환자들은 치료 불가능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추정했고 내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나는 인도에서의 나쁜 살논쟁이 생각났다. 그들은 당뇨병 환자들의 발에 궤양이 생겼을 때 괴저가 퍼질 시간을 갖기도 전에 종종 무릎 밑을 절단하곤 했다.

     

    그러나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 있는 한 의사가 그 해결책을 제공해 주었다. 당뇨병 분야의 유명한 전문의 존 데이비드슨은 남부의 당뇨 클럽에 참석했다가 나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자기 병원으로 돌아가서 발병 치료사 한 사람을 고용해 환자의 발을 진찰했다. 몇 개월 뒤 데이비드슨이 내게 전화했다. 그의 목소리에 회의가 아닌 흥분이 섞여 있었다. “제가 무슨 발견을 했는지 박사님은 믿지 못하실 겁니다. 작년에 우리 환자 중에서 무려 150명이 절단 수술을 받았는데, 우리는 대부분 문제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이후로 그들은 당뇨병 환자들의 발을 초기에 치료하고 심각한 감염을 예방할 수 있었으며, 그 간단한 방법으로 인해 그 클리닉은 환자들의 다리 절단 비율을 곧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존 데이브드슨은 우리 발 진료소의 제일 가는 지지자가 되었고, ‘발 치료 센터는 이제 나환자들뿐 아니라 당뇨 환자들도 빈번히 드나들게 되었다.

     

    나환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고통은 적이 아니라 적을 알려 주는 충성스런 정찰병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재확인해 주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내 인생의 주요한 역설이 있다. 그것은 내가 고통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생을 보내고 있는데도, 그런 결함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고통에 대해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고통은 참으로 아무도 원치 않는 선물이다. 선천적인 무고통, 나병, 당뇨병, 그리고 기타 신경 이상 증세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고통보다 더 귀중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좀처럼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는 그것에 분개한다.

     

    직업 스포츠 코치들은 고통의 신호들을 곧잘 무시한다. 부상당한 축구 선수들은 탈의실에 들어가 진통제 주사를 맞고 부러진 손가락이나 갈비뼈를 테이프로 감고 경기장에 다시 나간다. 한번은 NBA 농구 경기에서 스타 선수 밥 그로스가 발목을 심하게 다쳤는데도 계속 뛰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팀의 의사는 그로스의 발 세 군데에 강력한 진통제인 마케인을 주사했다. 경기 도중, 그로스가 리바운드를 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는 순간 "" 하는 큰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경기에 몰두한 그로스는 두 번이나 코트에서 뛰어오르다 결국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발목에 있는 뼈가 부러졌다. 고통의 경고 체계를 무시함으로써 그로스는 영구적인 손상을 일으키는 부상에 자신을 방치시킨 것이며 결국 농구 선수로서의 생명을 조기 마감해야 했다.

     

    고통을 존중하는 태도로 인해 나는 특히 현대의 서구 사회에서 때때로 혁명가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여행할 때마다 나는 얄궂은 정반대의 법이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어떤 사회가 고통을 제한할 수 있는 능력을 얻으면, 남아 있는 고통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고통의 문제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염려하고 하나님을 향해 비난의 손짓을 하는 사람은 제3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풍요로운 서방 세계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작가들이다.) 인도의 마을 사람들은 대개 고통을 잘 알고 있고, 고통을 기대하며, 고통을 인생의 피할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인도 사람들은 마음과 정신의 수준에서 고통을 제어할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터득했으며, 그것은 서구에 사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내심이다. 반면, 서구 사람들은 고통을 불의나 실패 또는 행복에 대해 보장된 권리가 침해받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고통은 절대로 외부에서 침투하는 적이 아니다. 나의 몸이 나에게 어떤 위험을 알려 주기 위해 파견한 충성된 전달자다. 고통의 신호를 침묵하게 하려고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은 사실상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1년에 3만 톤의 아스피린을 소비한다. , l인당 평균 250알을 소비하는 것이다. 더 새롭고 더 좋은 진통제가 계속 소개되고 있고 소비자들은 그 약을 꿀꺽 삼켜 버린다. 판매되는 마약의 삼분의 일이 중추 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다. 세계 인구의 5%에 해당하는 미국인들이 세계에서 생산되는 마취제의 50%를 소비한다. 그러나 이러한 탐닉의 결과는 무엇인가? 나는 미국인들이 고통이나 고난에 대처할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증거를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끔찍한 현실을 피하기 위한 일차적인 수단으로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이 우후죽순처럼 번져왔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고통을 해결할수 없는가?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해결책으로 얻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는 만일 과학자들이 정말 완전한 무고통의 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두렵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고통의 소음을 없애는 좀더 효과적인 방법이 개발됨으로써 나는 이미 무서운 징조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통해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고통에 귀를 기울인 다음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한 변화는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고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낙관주의적 기질과는 상반되는 태도가 요망된다.

     

    197211, 나는 딸 메리가 우리의 첫 손자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비로소 나는 미네소타로 가서 이 새로운 현상을 직접 경험했다. 도착하자마자 메리는 자랑스럽게 대니얼이라는 건강한 아들을 내밀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정형외과 의사의 역할로 돌아가 그의 손가락 마디들과 척추 곡선과 발의 각도 등을 살펴보았다. 모든 부분에 대한 조사가 훌륭하게 끝났다. 그러나 시험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시험해 보기 앞서 메리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보통의 꼿꼿한 핀을 가지고 손가락 하나의 끝에 있는 고통 체계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시행했다. 물론 나는 점잖은 할아버지였지만, 그 실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니얼은 그 손을 홱 잡아당기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손가락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정상이었다! 그의 반사 신경은 설계에 따라 정상적으로 작용하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이미 꼿꼿한 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가슴에 꼭 껴안고 그 작은 손가락에 대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우리가 정부의 막대한 연구 보조금을 써가며 개발한 가장 정교한 고통 감지 장갑은 변환기 스무 개를 장착하고 있었으며 거의 만 달러에 달하는 가격이었다. 그러나 이 어린 아기는 그 하나의 손가락 끝에만 해도 천 개의 고통 감지기들을 갖추고 태어났으며, 각각의 감지기는 손가락 끝의 정해진 특정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로서 약간의 긍지를 느꼈다. 왜냐하면 나의 개인적인 유전자 코드가 그 아이를 만드는 데 관여했기 때문이다. 나는 값비싼 전자 변환기를 갖춘 고통 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지만 나의 DNA는 자연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대니얼에게 있는 소형 변환기들은 아주 다양한 외상성의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압력들을 걸러 낼 수 있고, 배선 속에 어떤 짧은 회로나 외부의 아무런 유지 장치도 없이 70-80년 동안 척추로 계속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고통의 감지기들은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작동하고, 그 스위치는 그가 만질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 어려 위험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 감지기들은 정확했고 신속했으며 반응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어졌다. 나는 익숙한 후렴구로 기도를 끝냈다.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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