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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역사서 연구
    신학참고자료/신약 2021. 12. 12. 22:14

    목 차

     

     

    여호수아 4

     

    A. 팔레스틴의 주요 지형 4

     

    a. 해안지대 4

    b. 중앙산맥 6

    c. 요단계곡 7

    d. 요단 동편의 고지들 8

     

    B. 각 지파에 분배된 땅들의 경계 10

     

    C. 가나안 정복시 주요 사건들 11

     

    D. 아마르나 서신 12

     

    E. 가나안 정복시 팔레스타인의 국제정치 상황과

    가나안 내부 상황 14

     

    1. 팔레스타인의 국제 정치 상황 14

    2. 가나안의 내부상황 14

     

    F. 가나안 정복의 세 학설 16

     

    1. 평화 이주설 16

    2. 폭동설 17

    3. 정복설 18

     

    G. 멸종의 전쟁에 대한 신학적 이해 23

     

     

    사사기 25

     

    A.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 25

     

    a. 가나안의 종교 25

    b. 가나안 문화 27

     

    B. 각 사사들의 이름과 연대별 순서와 주요 업적 28

     

    1. 웃니엘 28

    2. 에훗 28

    3. 삼갈 29

    4. 드보라 29

    5. 기드온 29

    6. 돌라 30

    7. 야일 31

    8. 입다 31

    9. 입산 31

    10. 엘론 31

    11. 압돈 31

    12. 삼손 32

     

    C. 초기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징을 언약과 연결시켜 논하라 33

     

     

    사무엘 상하 35

     

    A. 다윗 당시의 이스라엘 인근 국가들의 이름과 위치 35

     

    B. 이스라엘에 왕정이 생긴 이후 일어난

    근본적인 정치, 종교, 경제 사회적인 변화 36

     

    1. 사울왕 36

    2. 다윗 36

     

    C. 비평학자들의 소위 친왕조 본문과 반왕조 본문 38

     

    1. 소위 반왕조 본문 38

    2. 친왕조 본문 38

    3. 비판 39

     

     

    열왕기 상하 40

     

    A.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일어난 변화 40

     

    B. 이스라엘(유다, 이스라엘)을 지배한 왕조와 왕들과 특징 42

     

    1. 북왕국의 왕조들 42

    2. 유다 왕국 44

     

    C. 열왕기 저자가 언급한 다양한 선지자들의 사역 51

     

    1. 선지자 엘리야 51

    2. 엘리사 52

    3. 아모스, 호세아 53

    4. 이사야 53

    5. 미가 54

    6. 요나 54

     

    역대기 상하 56

     

    A. 역대기와 사무엘-열왕기 비교 56

     

    1. 사무엘-열왕기 56

    2. 역대기 57

    3. 열왕기와 역대기 비교 58

     

    에스더, 느헤미야, 에스더 60

     

    A. 에스라와 느헤미야 비교 대조 60

     

    B. 에스더의 내용과 주제 61

     

    1. 내용 61

    2. 주제 61

     

    C. 포로후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에 일어난 변화 62

     

    D. 포로 후 시대의 국제 정치상의 변화 65

     

    참고문헌 67

    여호수아

     

     

     

     

    A. 팔레스틴의 주요 지형

     

     

    문헌개요 :

    Y.아하로니. 구약성서지리학, 대한 기독교 출판사, pp17-145

    이희철. 지리로 본 성서의 세계, 생명의 말씀사

     

     

    팔레스틴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특히 두 개의 대륙이 묘하게 집중되어 몰려드는 작은 접합점, 그리고 수 많은 나라들이 지나다니는 세계의 골목길로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대륙과 문명의 다리로서 그리고 성경을 아는 지식으로 세계 모든 민족의 족보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바다와 사막의 사이에 펼쳐진 지역으로 특이한 기후로 인하여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팔레스틴은 이와 같이 그 지역이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은 지역들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작은 지역들은 서로 전혀 판이하다. 이 땅은 경도상으로 해안 평야 지대, 중앙 산맥 지대, 요단 계곡, 트랜스 요르단 고지대이다.

     

    a. 해안 지대

     

    1. 악고 평야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해안 평야로서 북쪽의 라스 엔-나쿠라 벼랑과 남쪽의 갈멜산에 의해 분계된다.

    악고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며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다. 또한 중요한 두번째 지역은 악십으로서 평야 북부에 있는 항구 성읍이다.

    하이파만(기손강 하구의 만) 남단에는 텔 아부 후암이라는 항구가 있는데 이 항구는 가나안 시대와 이스라엘 왕국 초기에 번창했었다. 남부 평야에는 사철 동안 마르지 않는 나마인강이 흐르며 이 강의 주요 수원은 주로 텔 엘-쿠르다네이다. 이곳은 아마 고대의 아벡(19:30;1:31)인 것 같다. 성경 시대에 남부 악고 평야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악삽이다.

     

    2. 이스르엘 계곡

    이 계곡은 중부 산맥을 양분하고 있는 가장 큰 계곡이며 요단 골짜기와 해안 지역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계곡이다. 이사갈의 한 도시였고 오므리 왕조의 겨울 수도였던 이스르엘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그 계곡 이름을 지었다. 이스르엘은 그 계곡의 동쪽 맨 끝에 그리고 갈보아산 정상보다 높은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골짜기는 충적토가 많다는 점과 해변 길의 중요한 지로들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골짜기의 주요 도시들은 욕느암, 므깃도, 다아낙, 이블르암으로서 서쪽 방면을 따라 있었다. 이곳에서 결정적인 전투들이 많이 있었으며, 경쟁 세력들의 주 목표였다.

     

    3. 샤론 평야

    갈멜산맥으로부터 욥바 지역에까지 이르는 해안 평야이다. 이 이름(대상5:16)평평한 지방이라기 보다 산림지역이 성경에 암시하는 표현에 맞다고 할 수 있다(33:9;35:2).

    샤론 평야 서부에는 거주자들이 거의 없었고, 주로 하상에 따라 집중되어 샤론에서 먹이는 소떼들”(대상27:29)에게 좋은 지역이 있었다.

    주요한 항구로는 돌과 욥바가 있었다. 이 도시들은 남 왕국과 북 왕국의 주요 항구 도시의 역할을 했었다.

     

    4. 블레셋 해안

    최남단의 해안 지역으로서 블레셋 족속은 주전 12세기 기간 동안 정착했다. 결국 이곳에 정착한 그들로 인하여 그들의 이름이 로마 세계의 중개를 통해서 전지역에 적용되었다.

    해안 평야는 남쪽에서 넓어지며 충적토가 황토와 섞여있는 땅이므로 사람들의 통행을 보다 용이했다. 그리고 가사 지역으로 내려갈수록 강우량은 충분하여 평야지대의 풍작을 거두기에 좋았다.

    최남단의 해안도시인 가사는 그 지역의 중심지였으며, 이집트 지배하에서는 가나안의 지방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아슬글론은 블레셋의 주요 항구였으며, 갓과 에그론은 유대 세벨라에서 주요 경쟁의 대상이었다.

     

    5. 세벨라

    세벨라는 남부 해안 평야와 유대 광야 사이있는 에오세기의 석회암으로 형성된 구릉지역이다. 이 지역은 올리브 나무와 특히 무화과 나무들로 유명하였으며(대상27:28;왕상10:27), 고대에는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다.

    세벨라는 블레셋 족속 등으로부터 방어 역할을 하는 유대 왕국의 가장 소중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요새지는 아얄론 골짜기에 게셀, 아얄론, -호른, 소렉 골짜기에 벳-세메스, 딤나, 소라, 엘라 골짜기에 소고와 아세가, 헤브론으로 가는 길에 라기스와 마레사가 있었다. 성경에 이 도시들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이 도시들이 주변 지역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었기 때문이다.

     

    6. 서부 네게브

    연중 강우량이 300mm100mm 전선 사이에 있는 약 48킬로미터의 지역이며 그 중앙에 브엘세바가 있다. 이 지역은 평지이며 대부분 비옥한 순 황토로 덮여있다. 거주하기에 어려운 문제들은 물과 인접 사막의 유목민들이다. 강우량은 다른 지역과 강우량이 대단히 다르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족장들이 당한 한발 기간에도 서부 네게브의 그랄에 있었음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

    베두인족들에 의해서 끊임없는 위협을 당하는 지역이었다. 실예로 다윗이 시를락을 비운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여러 네게브의 거주민들을 약탈한 일이 있었다(삼상30). 그러므로 이 지역은 베두인족을 물리칠 수 있고 가물 때에 거주민들을 도울 수 있는 강력하고도 이해관계를 가진 정부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만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이다.

    북부 네게브는 와디들이 있는데 이것은 네게브의 물줄기들”(126:4)로 유명하다. 서부 네게브에는 에쉬-샤리아(성경에는 그랄 골짜기)와 샬랄레(성경에서는 베솔)와디가 있다.

     

    b. 중앙산맥

     

    중앙산맥은 해안 평야와 세벨라로부터 갑자기 높아지며 그 고지들은 대개 북쪽에서 넓고 평평하지만 남쪽은 비교적 좁다. 이 지역의 일부는 고대에는 산림으로 우거져 있었고, 대부분은 정착민들에 의해 벌목되고 과일 나무들이 대신 심겨졌다.

     

    1. 갈릴리

    산지 가운데서 가장 높고 최북단에 있다. 산지들 가운데서 가장 신선하고 초목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올리브 나무와 각종 과일나무들로 덮여 있다. 갈릴리는 높은 갈릴리와 낮은 갈릴리로 나누어진다.

    높은 갈릴리는 산악 고원이며 남쪽 지대들은 산악지형으로 거주하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으나, 북쪽 지역은 넓은 고원으로 되어 있고 많은 샘이 있어 거주하기에 충분하였다.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거주지는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20:7)였던 것 같다.

    낮은 갈릴리는 모든 산지들 가운데서 가장 평평한 지역이다. 여기의 골짜기로는 에스-샤굴 골짜기, 라마(19:14), 두란 골짜기이다. 그리고 납달리의 아다마(19:36), -히마(19:33)가 있다. 잇사갈 지파에게 속했던 야르뭇(21:29)이 있다.

    갈릴리를 가로 지르는 많은 산맥들과 단층들 때문에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교역로는 가장 험하였다. 이리하여 길들은 갈릴리를 가로 질러 도서 방면으로 뚫려 있었다.

     

    2. 에브라임 산

    이 산지는 중앙부에 있다. 사실 에브라임 지파는 이 산의 남부만을 점령했으며, 북쪽은 므낫세 지파가 살았다.

    에브라임산 남부는 북부보다 높은 지대로서 산악 고원을 이루고 있다. 바알 하솔은 가장 높은 곳으로서 광대한 초목재대를 갖고 있어서 인구가 조밀하였다. 미스바, 벧엘, 실로와 같은 주요 도성들이 중요한 산간 도로를 따라서 또는 근처에 있었다(1:19).

    에브라임산 북편은 남부보다는 덜 비옥하지만 통행에 편리한 길들이 사방에 뚫려 있어서 소통하기 쉽다. 이런 이유로 일찌기 도시화 되었다. 세겜, 답부아, 도단이 발달하였다. 그중 세겜은 팔레스틴의 제일 도시였다.

     

    3. 유대 산지

    유대 산지는 고원이며 가파른 경사지들에 의해 보호되어 남북 도로가 동쪽 끝 근처를 지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예루살렘, 베들레헴, 벳술, 헤브론과 같은 주요 도성들이 있다. 포도와 같은 과수 재배에 아주 좋은 비옥한 토양을 가졌으나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강우량이 적어져서 목축에 적합하다.

    주요 성읍들은 사막의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동쪽 지대에는 엔-게디와 조금 작은 몇개의 요새지 및 거주지를 제외하면 오래 거주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서쪽 지대는 봄에 가축들을 위하여 방목지로 사용되었다. 유대 산지의 여러 지역들은 마을 이름을 따라 드고아 광야, 십 광야, 마온 광야 등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사막에 가까운 서부 유대 산지는 깊은 계곡들과 비밀 동굴들이 많아서 피신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헤브론은 가장 높은 유대 산지의 중앙에 있으며, 예루살렘은 북쪽 경계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영지에는 트랜스 요르단으로 넘어가는 최남단의 통행로가 있었다.

     

    4. 동부 네게브

    동부 네게브는 중앙산맥 지대가 연속되는 곳으로서 비는 아주 조금 내리고 증발이 심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평평하며 기후와 습도의 차이가 적어서 농경과 축산의 가능성은 높다. 주요 성읍들은 아랏(12:14)과 호르마(14:45;21:3;12:14)였는데 큰 와디 메사스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네게브 동부 지역에는 유목민이 유일한 주민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크고 황량한 사막이 있는데 이 황무지는 신 광야, 바란 광야, 시내 광야 등으로 불리고 있다.

     

    C. 요단 계곡

     

    이 계곡은 평균 넓이가 16킬로미터나 되는 길고도 깊은 침곡이며 그 중앙에는 요단강이 헬몬산을 발원지로 하여 사해로 흘러 내려가고 있다. 이 계곡은 대체로 가파른 경사지들이어서 거대한 절벽들이 종종 나타난다.

     

    1. 훌레 골짜기

    이 골짜기의 북쪽 끝은 성경에 나오는 이욘으로서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 경계에는 눈으로 덮여 있는 헬몬산이 있다. 이 지역은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며 서늘하고 상쾌한 기후를 가졌다.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미스바 땅, 혹은 미스바 골짜기로서 성경시대에는 이스라엘, 뵈니게, 아람에 인접한 경계 지역이었던 같다.

    이욘 남쪽에는 아벨--마아가 있다. 아벨--마아가 동쪽에는 이스라엘의 가장 오래된 성소가 있던 단이 있다. 훌레 골짜기 남단 근처에 조그마한 훌레 호수가 있으며 이 호수 남서쪽에는 하솔이 있다.

     

    2. 긴네렛

    갈릴리 바다(성경에서는 긴네렛)는 자연적 담수호로서 많은 고기가 잡이며 주변의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돌풍으로 인해서 끓는 가마솥처럼 끓어 오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갈릴리 바다는 좁은 계곡들로 둘러 싸여 있다. 비록 작긴 하지만 비옥한 충적토와 풍부한 물, 그리고 따뜻한 기후 때문에 팔레스틴에서 인구가 가장 조밀하고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긴네렛 시는 하솔행 간선 도로상에 있는 헵타페곤의 일곱 샘에서 북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갈릴리 바다를 긴네렛 호수라고 부른 것은 성경 시대부터였다. 그러나 디베랴시가 함맛과 락갓 사이에서 약간 남쪽에 건설된 후로는 이 호수의 이름도 디베랴 호수라고 불렸다.

     

    3. 요단 골짜기

    요단 골짜기는 엄격한 의미에서 갈릴리 바다와 사해 사이에 있는 길이 약 112킬로미터의 길고 좁은 지역이다. 요단강은 이 골짜기의 중앙을 S자 꼴로 꼬불꼬불 돌아가면서 흘러가고 있다. 이 때문에 배는 다닐 수 없다. 그리고 수로 근처의 좁은 지역은 초목들이 있는 소르가 있다. 이 지역은 각종 동물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성경시대에는 사자까지 볼 수 있었다(29:19). 이 지역 위에는 요단 계곡의 주요 부분인 고르가 있다. 고르는 아주 사막과 같이 황폐되어 있다.

    요단 계곡으로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강은 얄루드강으로서 벳산 골짜기에 있다. 벳산 골짜기는 가나안 족속이 지배하던 시대와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가장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었다.

    요단 골짜기 동부는 서부보다 강이 많다. 가장 큰 강은 얍복강이다. 이 코스를 따라 숙곧과 사르단, 브니엘과 마하나임이 있다. 얍복강 남쪽 지역들은 이스라엘 족속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진을 쳤던 곳(33:49)으로서 모압 평지라고 불리운다.

     

    4. 사해

    사해 양편에는 높은 벼랑들이 솟아 있으며 사해의 남서 모퉁이에는 소금 산 예벨 우스둠이 있다(19:26). 사해는 생명이 없는 바다, 염분이 많은 사막과 산과 같은 거대한 소금 기둥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 뽀얀 먼지로 뒤덮여 있는 곳,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더위가 거의 일년 내내 계속되는 곳이다. 그러나 담수가 흐르는 강들과 샘들이 있는 곳에는 경작지가 있다. 그래서 아가서에서는 이 땅의 아름다움과 풍요함을 노래하고 있다(1:14). 사해 주위에는 오아시스들이 있는데 그중 여리고는 가장 고대의 성읍이다.

     

    5. 아라바

    아라바는 요단 계곡의 연장으로서 사해와 엘랏만 사이에 있다. 성경에서는 요단 골짜기 지역까지 포함해서 아라바라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사막이다. 이곳에는 홍해의 항구인 엘랏(아카바)가 있다.

     

    D. 요단 동편의 고지들

     

    요단 동편의 기후는 서늘하여 많은 양의 비가 온다. 그러나 고원 지대의 동부는 사막과 대단히 밀접하게 있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징으로 인해 주로 목축을 하며 비가 충분히 내리는 곳은 밀이 으뜸가는 곡물이다.

     

    1. 바산

    바산은 트랜스요른단의 북부 지역으로서 주로 야르묵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바산은 가장 비옥한 현무암 고원지대이며 바산의 암소들은 태평 성세를 알려주는 유명한 말이었다(4:1). 중심지역은 아르곱이었다(왕상4:13;3:4f). 바산의 동쪽에는 하우란산이 사막의 피해를 막아 주었다. 하우란산은 아마도 레바논산이나 갈멜산과 맞먹는 산(33:9)이며, 성경의 바산산(68:15)과 동일한 것이며 상수리 나무로 유명한 산이다(2:13;27:6).

    바산의 고대 수도는 아스다롯이었으며 아스다롯 서쪽 지역은 그술이 있었다(12:5).

     

    2. 길르앗

    길르앗은 얍복강에서 남북으로 해발 1000미터 이상이나 솟아있는 비교적 높고 험분한 산지이며 사막에 가깝다.

    서쪽 경사지들과 산역은 고대에는 주로 산림지였다. 그러므로 라밧-암몬과 야아셀과 헤스본과 같은 성읍이 발전하였다. 야아셀과 헤스본은 르우벤과 갓 지파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리고 험준한 지형 때문에 이 두 지파의 경제는 주로 목축에 의존했었다.

    북부 길르앗에는 야베스-길르앗과 라못-길르앗이 있다. 이곳에는 야일(므낫세 자손중의 하나,32:41)과 같은 족속들이 거주했다. 이곳의 지배적인 세력은 므낫세 족속이었다.

    길르앗은 트랜스요르단에서 이스라엘 주민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여러 왕들이 정치적인 위기에 처할 때마다 피신처가 되었었다.

     

    3. 모압

    높은 고원 지대로서 구약성경에서는 미솔 곧 평야라고 부르고 있다(3:10). 북쪽에는 길르앗과 모압을 갈라 놓는 자연적인 경계선이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압의 북쪽 지대에서는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분쟁이 항상 계속되었다. 북부 지역의 주요한 성읍들은 북쪽의 메데바와 남쪽의 디본이었다. 모압의 경제는 목축에 의존하고 있었다(왕하3:4).

     

    4. 에돔

    팔레스틴의 최후의 지역은 에돔, 또는 세일산이다. 높은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에돔은 아라바의 동쪽까지 뻗어있다. 고대에는 이 지역이 대부분 울창한 관목의 숲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은 세일, 털투성이산이라고 불렸다.

    에돔은 남쪽 사막과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험준한 지역이며 골짜기들과 자연적인 요새들이 많아서 피난처가 되었으며 매우 강력한 지역으로서 독립을 누렸었다. 이스라엘과 유대가 에돔을 점령하는 주요 목적은 홍해의 엘랏 항구를 포함하여 왕의 대로의 남단과 아라바 길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팔레스틴의 역사에 있어서 이곳이 고대 근동의 국제적인 교역의 동맥이었기 때문에 도로망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팔레스틴의 도로들은 그 기능과 중요성의 척도에 따라 세가지 유형으로 구별된다.

    첫째, 국제 고속도로이다. 이 도로는 해변 길왕의 대로이다.

    둘째, 지역안의 도로이다.

    세째, 시골길이다.

     

     

     

     

     

    B. 각 지파에 분배된 땅들의 경계

     

     

     

     

     

     

     

     

     

     

     

     

     

     

     

     

     

     

     

     

     

     

     

     

     

     

     

     

     

     

     

     

     

     

     

     

     

     

     

    C. 가나안 정복시 주요 사건들

     

     

     

     

     

     

     

     

     

     

     

     

     

     

     

     

     

     

     

     

     

     

     

     

     

     

     

     

     

     

     

     

     

     

     

     

     

     

     

    D. 아마르나 서신

     

     

    문헌개요 :

    원용국. 성서고고학 구약편, 세신문화사(1989.10.5), pp251-252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142-143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112-113,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p99-100

    글리슨 아처. 구약총론, 기독교문서선교회, pp301-309

    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신행협회, pp193-195

     

     

    1887년 아멘호테프 4(B.C.1376-1326) 때의 수도였던 이집트의 고대 아크헤타톤 곧 텔--아마르나에서 애굽의 농사짓는 여인에 의해 옛날 외교 서신의 한 뭉치가 발견되었다.

    이 서신은 점토 비문에 바빌로니아 설형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설형 문자는 애굽 18대 왕조 때의 국제 교류시에 사용된 언어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가나안 지방의 왕들이 애굽왕에게 보낸 긴급 원병을 청원한 문서였다. 이 편지에는 가나안 통치자 간의 계략, 대항책, 반박의 고소문 등이 혼돈상태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 특별히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이 서신이 출애굽 연대를 고증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서신에 하비루(Habiru)”의 군대가 침입하였으니 어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하비루(Habiru)”히브리(Hebrew)”는 그 이름이 서로 동등하므로, 그리고 이 백성들에 의해 야기된 문제점들은 초기 연대를 기초로 할 때 대략 이스라엘의 정복 시기에 일어난 것이므로, 이 하비루를 여호수아의 침략군대로 볼 만하다. 그리하여 콘더(C.R.Conder)는 이 서신들은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한 가나안 정복과 그와 관련된 사건들의 결과를 가나안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짐메른(H.Zimmern)도 아마르나 서신이 히브리인의 가나안 침략을 기록한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하였다. 윙클리(H.Winckler)는 확신하기를 설형 문자 SA·GAZ로 불리워지는 약탈 군대들이 하비루와 동일시된다고 했다. “SA·GAZ”란 사람들은 페니키아의 시돈 지방까지 널리 퍼져 있던 가나안 군주들의 서신 안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Habiru란 말은 이 토판에서 비로소 알려진 말은 아니다. 바벨론의 첫 왕조 때부터 그 말은 주전 2000년의 초기쯤 일찌기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회에서도 알려진 말이었다. 그들은 림-(Rim-Sin)의 수메리안 기록들과 바벨론의 함부라비 법전, 그리고 마리(Mari)의 짐리-(Zimri-Lim)의 아카디안 기록들에서도 언급된다. 또한 이 하비루란 이름이 武人이란 말에 의해 가끔 수식된다. 이 하비루 사람들이 단일 민족인지, 혹은 일정한 거처도 없이 집시처럼 방황하며 사는 유랑 집단들인지는 학자들 간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린버그(Moshe Greenberg)하비루 사람이란 그들의 혈족 근원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공통된 특징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방랑하고 다니며, 타국정부에 고용된용병, 혹은 노예나 농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클라인(Metedith Kline)은 하비루 사람들이 정부의 고급 관리들과 같이 시 행정의 지도자들도 있으며, 이 하비루 사람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기록들을 볼 때 단순히 노예적 신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우가릿에서의 발견은, 하비루가 애굽 기록에 나오는 아피루(‘Apiru)에 대한 언급과 동일한 사람임을 분명하게 했다. “하비루란 말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리키는 히브리란 말의 세 자음(רבר)과 같은 어원의 단어이다. 그리하여 이 두 단어가 동일시된다.

    그러나 그린버그와 다른 구약 학자들은 하비루 사람들과 가나안을 침략한 이스라엘 사람과 동일시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하비루 사랍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활동하며, 하비루 사람들과 동일시되는 SA·GAZ 사람들이 시리아, 페니키아에서 활동했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인들이 메소포타미아나 시리아, 페니키아 등에서 싸웠다는 분명한 기록들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에서는 가장 북쪽의 아셀이나 납달리 족속이 두로, 시돈, 비블로스 등 북쪽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다는 내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서가 각 지파의 모든 전쟁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시리아나 페니키아에서 싸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메이어(Edward Meyer)가 말한대로 아마르나 서신에서 애굽의 바로왕과 서신 왕래하는 가나안 도시들은 메기도, 아스켈론, 아코, 게제르, 예루살렘들로서 이 도시들은 이스라엘이 후기에 점령했던 도시들이었던 사실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한편 뵐(F.Bőhl)도 이미 이스라엘에 의해 멸망되었거나 여호수아 군대에 합류되어 버린 도시들, 즉 여리고, 브엘세바, 기브론, 헤브론은 아마르나 서신에서 애굽과 서신 교류를 하지 않고 있음을 볼 때, 아마르나 서신에 언급된 하비루족은 여호수아 군대가 가나안을 침략한 후 가나안 도시들과 싸우는 이스라엘 군대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E. 가나안 정복시 팔레스타인의 국제 정치 상황과 가나안 내부 상황

     

     

    문헌개요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150-156

    Y.아하로니. 구약성서지리학, 대한기독교출판사, pp17-23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187

     

     

     

    1. 팔레스타인의 국제 정치 상황

     

    팔레스타인은 두 개의 대륙이 묘하게도 집중되어 몰려드는 작은 접합점, 그리고 수많은 나라들이 지나다니는 세계의 골목길이었다. 그러기에 팔레스타인은 여러 문화들이 왕래하는 곳으로서 대륙과 문명의 다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장점은 오히려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의 중간 지역이 되어서 이 두 거대한 왕국의 공격물이 되었으며 육교 노릇을 하였다.

    가나안은 도시 국가의 땅이었다. 중앙 통치가 없었고 많은 도시들은 각기 자기의 왕을 갖고 있었다. 애굽은 대군주라고 하지만 사실 이름 뿐이었다. 모세의 큰 원수이자 애굽 제국을 건설한 투트모스 3세는 이 지역을 애굽의 지배 하에 두었다. 출애굽의 바로 왕인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도 엄격한 지배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의 바로 왕인 그의 아들 투트모스 4세는, 미타니의 왕 아르타타마의 아시아계 딸과 결혼하였는데, 외국 세력에 호의적이었으며, 군사적 점령에 관심이 적었다. 그런데 지금의 왕인 그의 아들 아멘호텝 3세는 외국 통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본국의 이익보다는 자기 자신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정복한 것을 자랑했지만 이것은 거의 무의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Hayes가 표현한대로 그가 아시아 지역을 소홀히 여긴 것은 애굽의 북쪽 제국 멸망에 길을 놓아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르나 서신은 침략자들에 대한 가나안의 도움 요청에 귀를 막아버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가나안의 각 도시들은 이스라엘의 정복상품 처럼 각기 내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의 임무가 용이하다는 말이 아니다. 39년전의 정탐자들은 가나안 백성들이 힘이 세고 그 도시는 강한 성으로 둘러 싸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백성들은 자기들끼리 그리고 외부의 적들과 자주 싸웠는데 이로 인해 그들의 병사는 노련하였다. 이 성읍은 한번에 몇 달 동안의 포위를 견딜 수 있도록 지어졌다. 또한 성읍들은 후에 여호수아에 대항하여 남쪽과 북쪽 연맹을 이룬 것처럼 공동의 적에 대해서는 함께 연합할 수가 있었다. 더우기 이곳은 산이 많은 땅이었다. 일단 여리고를 통과한 다음 이스라엘은 대부분 울통불퉁한 산지를 맞게 되어 전쟁 책략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2. 가나안의 내부 상황

     

    가나안은 물질문화가 진보하였다. 성읍은 잘 펼쳐 있었고 가옥은 훌륭한 설계와 건축을 나타내 보였다. 건물의 바닥은 포장되었거나 회반죽이 발라져 있었다. 배수 시설도 발달되었다. 노동자들은 구리, , 금을 사용하는 기술이 있었다. 자기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하였다. 애굽, 북방,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구브로를 포함한 외국 나라들과 광범위한 무역을 하였다. 기술적인 지식에 있어서 가나안은 광야에서 40년을 소비한 이스라엘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불균형으로 인해 이스라엘에게는 슬픈 현실을 가져다줄 심각한 위험이 놓여 있었다. 다음에 이러진 시기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흡수 되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이 단지 자기 제조, 도시건설, 농경방법과 같은 물질문화에만 관련된 것이었다면 오히려 혜택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고방식이나 개념, 특히 종교적인 신앙이나 예식을 포함하는 것이었을 때 그 피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여호와 보다는 가나안의 바알 숭배를 받아들에게 되었다. 그 매력은 바알이 비와 좋은 수확의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가나안 사람들은 이 새로운 이웃에게 풍성한 수확을 보장하는 데는 기술만으로 부족하고 올바른 신을 숭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충고했을 것이다.

     

     

     

     

     

     

     

     

     

     

     

     

     

     

     

     

     

     

     

     

     

     

     

     

     

     

    F. 가나안 정복의 세 학설 (정복설, 평화 이주설, 폭 동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자신의 견해를 성경에 비추어 제시하라.

     

    문헌개요 :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1992.4.20), pp95-103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 문서선교회, pp94-118

    김정우. [역사서연구], 총신대학신학대학원 강의안, pp40-48

    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신행협회, pp96-100

    글리슨 아처. 구약총론, 기독교문서선교회, pp253-266

     

     

    1. 평화 이주설

     

    평화 이주설은 알브레흐트 알트와 마틴 노트에 의해 주장되고 포러, 허만 등이 따르고, 코하비와 아하로니가 수정하고 최근에는 와이퍼트에 의해 다시 옹호되었다. 알트와 노트는 주로 성경외의 자료들을, 특히 투트모스 3세의 연대표와 아마르나 편지들에 의존하고 다음으로 고고학에 의존하여 성경의 기록이 역사 비평학에 일치하도록 재구성을 한다. 여호수아 2-11장에 있는 개개의 기술들은 동네의 기원을 제시하는 후대의 전설로서 이스라엘이 그 땅을 소유하였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알트는 이스라엘의 정착을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후에 이스라엘로 알려진 지파들이 이 땅에 들어올 때 유목민으로서 지파의 단위로나 혹은 지파의 연합으로 들어왔다. 점차적으로 이들은 상대적으로 사람이 적게 사는 곳으로 들어와 농사를 시작하였다. 정착의 형태는 동네마다 달랐다. 어떤 지역은 정복하는데 왕정시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론적으로 알트는 정복이 여러 단계를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알트는 성경을 문학적 분석을 따르며 신명기 사학파가 후대에 한 작업을 원래의 본문에서 제거하고 특히 수1-12장을 기원을 설명하는 전설로 봄으로서 여호수아도 전설적이고 상상적 인물이 되어버렸다. 여호수 1-12장은 원래 베냐민과 납달리의 전통에 관한 전쟁 이야기인데 후에 한 민족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 이스라엘 지파들은 야훼를 믿는 신앙으로 느슨히 뭉쳐져 있는 지파동맹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한 레아 그룹과 라헬 그룹으로 나누었다. 노트는 이 두 그룹 중 어느 것도 출애굽과 연관시키길 주저한다.

    평화 이주설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장점도 있다. 애굽의 자료에 소개된 지형적 구별은 성경적 기사와 일치한다(1:9;1:27,29,31,33,35). 둘째로 만약 애굽이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고 있을 때 정복이 이루어졌다면 왜 애굽이 침묵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애굽은 산지에 대해서는 통제를 못하고 있었다는 답을 제공해준다. 세째로 알트의 연구는 이 지형의 구분과 역사를 잘 조명해 준다. 네째로 후대의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갈릴리와 유대의 산악지역과 네게브에 수백개의 거주지를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첫째로 역사 비평의 전제는 성경 자체의 사관과 직접적으로 충돌을 일으킨다. 즉 성경의 역사성을 선험적으로 회의한다. 둘째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이 다듬어진 성경의 기사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는 고고학적 발견을 무시한다. 세째로 이스라엘의 전통이 어떤 역사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알트와 노트의 재구성이 인위적이고 주관적이다. 네째로 알트-노트 학파의 문제점은 그들이 주장한 지파 연맹의 개념에서 나타나는데, 성경은 하나의 중심 사당을 제시않고 여러개를 소개하며 지파 동맹적인 으회가 없다. 끝으로 이 가설은 성경 자체에 나타난 후대의 전통과 상충된다. 즉 예이빈이 말한 것 처럼 애굽에서의 거주와 팔레스타인의 정복에 대한 전통이 너무 강하여 이 역사 없이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

     

    2. 폭동설

     

    이 폭동설은 멘덴홀로 시작하여 곳발트가 다듬고 스칸디나비아의 엥넬 등 많은 학자들이 수납하고 있는 해석학적 모델로서 성경기자가 이스라엘의 왕조 이전 역사를 보여주는데 있어서는 확실히 믿을 많안 자료가 아니며 이스라엘이 후대에(1250-1150사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점에서 평화 이주설과는 상통하고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역사적 비교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는 다르다.

    멘덴홀은 가나안의 정복을 다루면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대규모로 진출함으로서 급속한 군사활동을 통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평화적인 이민으로 점차적으로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나안의 사회 속에서 내적인 봉기가 일어난 것으로 본다.

    그는 고고학적으로 볼때에 새 민족이 큰 무리를 이루어 청동기 시대 말기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한 흔적이 없으므로 이 시대에 도시를 멸망시킨 그룹을 파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파괴가 일어난 후에도 유물들 사이에 문화적 연속성이 남아 있다. 파괴 후에는 농민봉기가 경제를 혼란시켜 문화가 빈약해졌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실제적인 정복이 없었으며또한 인종말살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백성을 대규모로 몰아내지는 않고 오직 왕궁의 행정부만 몰아내었다고 말한다.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것은 종교적 운동과 동기로 기존하고 있던 사회적 단위들의 큰 그룹들 사이에 연대성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청동기 말 경에 그곳을 지배하던 도시들이 붕궤되어 가고 있을 때 힘을 모아 도전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의 왕국들에 승리를 거둔 것은 상당수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공동체로 이탈했기 때문이며, 이 현상이 삽시간에 이루어 졌다고 본다.

    노만 곳발트도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사회-정치적 분석을 시도하고 멘덴홀과 유사한 결론을 내려 이스라엘은 가나안인들 사이에서 봉기로 생겼다고 본다. 그러나 멘덴홀과는 달리 사회정치적 붕괴현상이 250-300년 마다 순화적으로 생긴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윤리와 정치적 힘을 연결시킨 것도 잘못되었고 멘덴홀이 이스라엘인들의 최초의 단결을 과장하여 진술했다고 한다. 끝으로 혁명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 졌다는 점을 비판하며, “도시 국가의 통치자들이 지닌 통제적 기능이 무서운 거물의 망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가나안의 혁명은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곳발트 역시 아피루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일부 백성으로 가나안의 관료 정치에 대항하여 농민 봉기를 일으킨 자로 본다.

    이 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 민21:27-30과 신3:11이 아모리인들이 야훼주의에 개종한 것을 감추고 있으며(21:27-30), 36자의 에돔의 지도자들을 이스라엘의 전통속에 길게 기록하는 것도 그들의 개종을 다루는 것이며 수 12자의왕들은 혁명에 의해 멸망한 자들이고 세겜에 모인 것은(24) 가나안 사람들 주 그들을 핍박했던 이념으로서 바알을 벗어 버리고 야훼에게로 개종한 것을 보여 준다고 한다. 곳발트는 어떻게 이 모델이 고고학적으로 시험을 받을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폭동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먼저 램지는 봉기의 연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13세기설을 지지하는 모든 논리들이 문제를 내포하며 멘덴홀과 곳발트가 정복의 모델을 부인함으로 폭동설을 지지하는 자는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로 성경의 전통은 이스라엘이 이 땅에 생소하였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으며 족장들도 이주를 다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유다의 언어는 가나안의 방언과는 다른 서북 셈족어였다.

    세째로 만약 봉기가 동네에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의 도움으로 일어났다면 왜 많은 도시를 완전히 부수었겠는가?

    끝으로 이 학파에 따르면 백성이 대규모로 이주하지 않았다고 하나 바다의 사람들(블레셋)과 아시아 사람들이 이주하며 문화와 정치형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위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파는 아피루를 규명하고 자극을 주고 이스라엘 나라에 가나안적 요소가 상당히 흡수되어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날 때 부터 여러 족속이 혼합을 이루었다고 한다.

     

    3. 정복설

     

    정복설의 모델은 두단계설, 초기설, 후기설의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모두들 정복을 받아들이나 역사적, 성경비평학적, 고고학적 자료를 사용하는데 큰 차이가 있다.

     

    1) 두단계설

    버니(1921)는 족장들의 이주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지파의 움직임을 대표하는 것으로 야곱지파는 어느 정도 가나안 땅에서 살다가 후에 아람인들이 등장함으로 동쪽으로 이주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들이 하비루와 같은 때에 움직였으며 이때 야곱지파는 세겜지역을 치했다(34)고 한다. 하비루의 정복이 시작된 후에 요셉지파는 애굽으로 들어갔고 람메세스 2세에게 박해를 받은 메르넵타 통치 때에 출애굽을 하였다. 레위와 시므온 지파는 원-유다 지파와 합쳐져서 네게브와 산악지역에 살게 되었다(1). 요셉지파와 레위지파는 누누어져 에돔을 거쳐 여호수아의 영도력 하엣 가나안으로 들어왔다.

    (1936)은 히브리인들이 세그룹으로 나누어져 북쪽을 중심으로 아셀과 단 등이 있었고 이들은 히브리인들 보다 더 원주민이었으며 둘째는 아마르나 편지에 있는 하비루들로서 그 중 하나는 복합적인 그룹으로 아람계통이었고나머지 하나는 모세의 지도하에 올라온 그룹이었다고 한다.

    로울리(1950)는 스불론과 아셀이 이미 14세기에 그 땅에 있었고 아마르나 시대 직후에 유다와 시몬은 남부를 차지하였고, 시몬과 레위는 세겜을 차지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창34장에 나온다. 모세의 영도하에 메르넵타 시대에 출애굽하고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약1230년에 들어왔다.

    로우톤(1953)은 두개의 출애굽이 있었는데, 하나는 13세기에 요셉지파가 먼저 나와 팔레스타인에 자리를 잡고 지파동맹을 맺고 두번째는 레위지파가 1170년에 나와 1125년에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아하로니(1957)와 예이빈(1971)은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을 거쳐 초기의 길을 따르고 후에는 돌아갔다고 한다(참조.33:41-4921장의 차이를 발견).

    위와 같은 이론들은 성경기록이 어떻게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아이에서 게겜으로 바로갔으며 세셈에서 아무런 갈등이 없었는가(34)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준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비평의 전제 위에서 작업을 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 기사와 상관없이 재기술하며 로울리는 특히 광야의 전통을 부인하고 있다.

     

    2) 초기설

    초기설은 전통적인 견해로서 15세기 후반기에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되 통일되고 완전하게 정복을 하였으며 요단강 동편에는 모세의 지도하에(20:21-22:1), 서편은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루어졌음을 믿는다(1-12).

    이 견해는 성경 기사의 역사적 가치에 높은 비중을 둔다. 정복 후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수세기에 걸쳐 땅을 병합하고 거주하기 위해 씨름하고 새로운 적들과 싸운다. 성경적 근거로는 왕상6:1에서 출애굽 연대는 1446년으로 정복은 1406년으로 잡는다. 70인역을 따르면 440년이므로 정복은 아피루의 시대인 1366년이 된다. 입다도(1100)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에 거주한지 300년이 되었다고 한다(11:26).

    초기 연대에 대한 첫번째 이유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시작한 때(주전966)보다 480년 앞서서 출애굽이 일어났다는 열왕기상 6:1의 진술이다. 주전 966년에 480년을 더하며 주전 1446년이 된다.

    또 이 연대는 사사 입다의 기록에서도 증명된다. 사사기 11:26에 보면 암몬 왕이 입다에게 길르앗 지역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주장했을때 그는 대답한 말 중에 이스라엘이 이 모든 성읍에 거한지 300이었다고 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여덟번째 사사이다. 그 이후에 4명의 사사들, 곧 사무엘과 사울, 다윗 왕과 4년간의 솔로몬 시대가 이어지는데 이는 모두 성전 건축 이전이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 시기 주전 966년에다 이들 지도자의 총 연수를 더해야 한다. 그러면 대략 주전 1100년 경으로 산출되는데, 이는 초기 연대를 근거로 한 정복시기 1400년 보다 꼭 300년 뒤가 됨으로 이 연대 계산은 맞다고 할 수 있다.

    세번째 이유로는, 사사시대의 길이를 분석해 보면 후기 연대에서 계산된 것보다 더 많은 길이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출애굽과 주전 1050년 경의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는 사이에 대부분은 사사기가 차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광야 시대, 여호수아 시대, 그리고 삼손이 죽고, 사울이 즉위하기까지 그 사이의 기간이 포함된 것이었다. 즉 총 61년이나 된다. 그러므로 출애굽과 주전 1050년 사이에는 이 61년과 사사기를 모두 포함하는 충분한 기간이 있어야 하므로 초기 연대설이 맞다.

    네번째 이유로는 성경의 사건과 초기 연대를 기초로 한 애굽 역사 사이의 상호관계에 있다. 성경에 나타난 출애굽이 15세기에 일어난 것이라면 애굽 역사와 잘 부합되지만, 13세기에 일어난 것이라면 부합하지 않는다.

    이밖에도 초기연대를 고증하는 고고학적 자료도 있다. 1930-1936년에 Tell es-Suttan에서 John Garstang이 발굴한 여리고 옛터의 모든 유적들을 감정한 결과는 주전 약 1400년경으로 나타났다. 그때는 애굽의 Amenhotep 3(1414-1378 B.C.)시대였다. 이 여리고의 파괴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으로 되어졌다고 생각할 때 이러한 자료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연대가 주전 약 1446년이라는 것과 일치된다.

    고고학적인 다른 또 하나의 자료는 아마르나의 편지이다. 이것은 애굽왕에게 가나안 지방 왕들이 하비루라는 군대가 침입하였으니 원병을 보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자료들의 감정의 결과는 가나안 정복을 증명하는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3) 후기 연대설

    초기 연대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출애굽의 연대를 주전 1446년 보다 200여년 후인 약 1229 B.C.경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고고학적 발견이 여호수아 1-12장에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복을 뒷받침하나 성경의 연대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한 세대를 대표하는 40의 열 두배인 480이라는 숫자가 열 두 세대임을 지적하면서, 실지로 한 세대는 40년이 안되므로 480에서 200년 정도는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열 두 세대라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480이라는 숫자를 말하고 있으므로 맞지 않다고 본다.

    둘째로, 여호수아가 점령한 다른 도시들이 파괴 연대에 관해 실질적으로 그 증거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라기스는 텔-이드-두웨일로 판명되었는데 여기에서 13세기 후반기로 추정되는 옹기의 조각을 발견되었다. 그리고 드빌에서도 검게 탄 재의 층이 발견되었는데 후기 청동기 시대로 추정된다. 하솔은 13세기 중 격심한 파괴의 증거가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여호수아 11:11에 여호수아가 멸망시킨 도시는 불살라졌다고 말하고있따. 그러나 지층 3에서 불에 탄 증거를 찾았는데 이를 근거로 여호수아가 실제로 파괴한 것은 13세기 지층 1의 도시가 아니라 지층 3의 도시라고 제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파괴는 13세기 전이고 당시 하솔은 거의 양도된 상태였다고 더욱 타당할 것이다. 라기스와 드빌은 여호수아 11:13에 보면 산 위에 건축된 성읍들은 여호수아가 불사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발견된 타버린 재의 층은 다른 파괴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과, 1400년의 층이 없는 것은 초기 연대를 기초로 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세째로 후기 연대를 주장하는 이유는 주전 1900년부터 1300년 사이에 요단 동편과 네게브 지역에 정착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민수기 20:14-2121:32-35의 말씀과 같은 성경 22-25장의 이 모든 사건들이 요단 동편 지역과 네게브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정착민이 존재한 1300년 이후에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통과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갔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한 이론은 그 근거가 빈약하다. 고고학적인 어떤 자료가 희소하다고 해서 거기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는 것은 지나친 이들이 속단이다.

    이들의 또다른 이유로 그들은 아마르나 편지에 나타난 하비르의 침략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삼하 5:6-9의 이스라엘은 다윗왕 때까지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기브온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그곳의 왕을 죽였다고 했다. 예루살렘의 완전한 점령은 여호수아의 죽은 후의 일이었으나(1:8) 비록 점령 후에까지도 그곳의 거민인 여브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한 기록이 있다(1:21).

    그리고 그들은 출애굽기 1:11의 애굽왕 바로가 이스라엘의 노예들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케했다는 기록을 들어, 그러한 공사는 람세스 2(1290-1224B.C.) 때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M.F.Unger 같은 학자들은 그것을 반대하여 말하기를 람세스 2세는 이미 건설돼 있던 비돔과 라암셋을 확장하고 수축한데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렝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은 것은, 소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인 아하모세(18왕조)를 위시하여 그 아들 아멘호텝 1(주전1539-1537)와 또 모세를 양육한 공주의 부왕인 Thutmose 1(주전1539-1514)와 또 공주의 남편이었던 Thutmose 2(주전1514-1504)와 또 그가 죽은 후 새로이 왕 위에 오른 Thutmose 3(주전1504-1448)와 그의 아들인 Amenhotep 2(주전1448-1424)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왕인 아멘호텝 2세는 그처럼 마음이 강퍅했던 역사적인 인물로서 그의 장남이 열번째의 재앙으로 죽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아멘호텝 2세 시대(주전1448-1423) 중 어느 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그들은 출애굽기 12:40430년은 힉소스 통치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야곱은 힉소스보다 150년 전에 애굽으로 갔을 것으로 본다.

     

    이상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에 대한 세 학설을 살펴 보았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정복설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본문과 여러가지의 고고학적 발견과 주변국가들과의 상황을 볼 때에 정복설이 이 세가지 정에 대한 해석 중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정복을 비교해보면 여호수아서는 완전한 정복을 사사기는 불완전한 정복을 그리고 있다. 여호수아는 정복의 완전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문제시된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땅이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를 여러가지로 제시한다. 즉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혹은 야생동물로 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7:22), 혹은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3:1-2)라고 설명한다.

    또한 정복설 중에도 많은 학설이 있지만 우리는 초기 연대설을 지지한다.

     

     

     

     

     

     

     

     

     

     

     

     

     

     

     

     

     

     

     

     

     

     

     

     

     

    G. 멸종의 전쟁에 대한 신학적 이해

     

    문헌개요 :

    피터 C.크레이기. 기독교와 전쟁문제, 성광문화사

     

     

    전쟁이라는 단어는 성서 중에 구약에서 그리고 역사서에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호수아의 군대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을 하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전쟁을 한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그들은 한사람도 남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전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한다. 단순히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명분안에서 글자 그대로 모든 남녀노소의 살인이 정당한 것인가? 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용사]인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신약과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분명 구약에서는 용사인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만군의 여호와]로 그리고 전쟁터에서 법궤를 통해 상징적으로 임했다. 그러므로 이 호전성 있는 자료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히브리인들은 다른 민족들이 당시에 취했던 대로 전쟁과 그들의 하나님을 단순히 동일화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강하게 드러내는 인간 사건들을 본질로 해석하려는 인류의 원초적 시도들이며, 하나님의 본질과 활동의 계시는 아니다. 즉 용사이신 하나님의 개념은 신인동형론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활동의 일반적 제형태를 통하여 개입하심으로써 인간사건들의 결과를 결정하셨다. 그러나 전쟁 속에서 하나님의 관여는 도덕적 존재가 아닌 그의 의지와 활동을 가르킨다고 할 수 있다. 용사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전쟁을 통해서 싸우시는데 이러한 인간역사에 개입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제일목적은 인간의 구원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그 인간들과, 그 세계에 구원을 갖다주려는 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신다. 이렇게 전쟁은 하나님께서 구속과 심판 양면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관여하심 속에서 인간의 악한 활동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관여에서 하나님께서는 용사이시다. 그리고 전쟁은 죄있는 인류에게 그 문제희망을 제공한다.

    하나님께서는 용사로 자기를 동질화하실 뿐 아니라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정복 전쟁에 종사하도록 명하셨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거룩한 전쟁이라고 한다. 공격적인 전쟁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수행되었다고 거룩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전쟁의 목적을 보면, 상대를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까닭으로 이스라엘은 가혹하게 한 것이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 속에서 그의 심판과 구속의 제 목적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일종의 악한 인간의 활동이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인들의 전쟁들은 종교적인 전쟁이었다. 그러면 성경적 종교의 상황속에 있는 전쟁이라고 하여 전쟁이 거룩하다고 불리워질 수 있는가? 사실 성경에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표현은 없다. 그리고 적을 섬멸하기 위한 잔학행위의 요구는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로 인해 나오는 또다른 질문은 십계명의 제6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이다. 전쟁은 애타주의에서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의 동기는 거의가 순수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속한 권리와 같은 인류로부터 생명의 재능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살인과 전쟁 간에 유사성이 있는데 둘다 죽임을 포함하고 있으며, 죽임은 인간존중의 결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십계명의 6계명의 살인이라는 단어는 동포 히브리인의 살인을 금하는 것이지 이방인의 살인 즉 전쟁에서 살인이나 사형집행을 금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같은 인간의 생명을 취할 권리를 스스로 소유하지 못한다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기본적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생명을 존중하는 원리가 그 계명속에 있다면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사용을 허락하시고 명하셨는가? 우리는 왕이 하나님인 이스라엘에서 전쟁과 사형집행의 사용은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에서 사용되는 종교국가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스라엘에서 살인은 금지되었지만 전쟁이 금지 된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가장 큰 것이 되고 살인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폭력을 거부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사는 우리는 세상 나라에 속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국가가 전쟁에 임할 수 밖에 없고, 국가가 시민들에게 그 전쟁의 지원을 요청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지자들은 전쟁을 통하여서 희망을 가졌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그들은 느끼면서 그속에서 폭력이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평화를 고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평화와 관련하여 약속된 현재사역을 적용할 수 있는 평화의 개념을 갖는 동시에, 우리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평화의 이상을 가지고서 이 세상과 더불어 살면서 그 세상을 위해 일하고 최종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려는 소망을 꽉 잡을 수 있는 신앙의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국가적으로 일어난다. 이스라엘을 볼 때에,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전쟁을 수행해야 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존폐가 달려 있는 중대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전쟁은 공격적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땅은 가나안 족속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출애굽 이후 계속되는 전쟁은 하나의 실제적인 생활방편이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국가 형태를 보면,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을 통하여 진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에서 세속나라의 왕을 섬기는 나라로 전락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에게 있어 전쟁은 생존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초기의 공격적인 전쟁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하는 것이었으며, 그 땅의 거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에서 정당화되었다. 이같은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 자신이 선택하고 약속의 땅을 허락하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저버릴 때에 악한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수단으로서 히브리 정복전쟁들을 사용하신 것으로 것처럼 이스라엘이 죄가운데 빠졌을 때 앗수르, 바벨론 등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사사기

     

     

     

    A.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

     

     

    문헌개요 :

    김희보, 구약 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1992.4.20),pp34-41

    원용국, 성서고고학 구약편, 세신문화사(1989.10.5),pp268-274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4.3.25),pp153-154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1993.4.10),pp187-188,230-231

     

     

     

    a. 가나안의 종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래 바벨론의 포로 때까지 그들에게 가장 큰 유혹의 대상은 가나안의 종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가나안의 종교는 부정하고, 잔인하고 부도덕 했다고 하겠다. 그 이유는 그 종교의식은 다신적이고, 인위적이고, 정욕적이고, 제물로는 인간의 귀중한 생명이 바쳐졌기 때문이다. 또 종교의식 중에는 추잡한 성적인 행위들이 성행되어 사회의 부패타락을 조장했다.

    가나안의 종교의 진상은 1929년에 발굴된 라스솨마라(Rasshamra)의 서판들의 기록들을 통하여 비교적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최고의 신은 로서 그는 모든 신들의 아버지였다. 신은 북방에서 모여 온 여러 신들을 모아 총회를 열고 그 의장이 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우가리트 문헌에 의하며 신의 아내는 아세라 여신이었다. 아세라 신은 성경에는 흔히 아세라 목상 또는 아세라상으로 되어 있다(3:7;대하24:18). 그러나 영문성경에는 70인경과 벌게트의 예를 따라 아세라를 나무기둥으로 번역했다. 이는 아마도 신당에 목주를 세우면 그것은 곧 아세라여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인들은 신당이 있는 곳에 그러한 나무를 심어(6:25,26,28) 소위 성수로 삼았다.

    의 아들은 바알이다. 그는 북방 하늘에 있는 어떤 높은 산에 왕좌를 베풀고 모든 가나안의 신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의 주라고 생각되며, 하늘의 비와 땅의 폭풍을 주관하는 신으로 섬김을 받으며 비를 주며 풍년을 주며 번영을 가져다 주는 신이었다.

    그러나 바알의 가장 큰 원수는 ’(Mot)이라고 부르는 불행의 신, 즉 죽음의 신이다. 또한 호른이라고 불리는데 기브온 전쟁시 전쟁터가 되었던 지방 중에 [벧호른]이란 곳이 있다(10:10).

    바알은 이 신과의 전쟁에서 일시 피살되어 7개년의 세월이 지난 후 바알신의 애인이요, 누이가 되는 아낫 여신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아낫 여신은 신을 죽이고, 부활한 바알신은 신의 왕좌에 앉아 다스림으로 세상에는 연속 7년간 큰 풍년이 있어 모든 식물의 번성을 보게 된다.

    그런데 바알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다곤신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바알신의 누이요 그의 아내인 아낫 여신은 아세라와 아스다롯과 더불어 가나안의 3대 여신 중 하나이다. 아낫 여신은 못신을 이긴 전쟁의 여신이기도 하며 성(sex)을 주관하는 여신이기도 하다. 이 아낫 여신은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이름에도 잘 반영이 될 정도로 큰 숭배의 대상이었다(3:31). 이 여신은 또 쿠두슈’(Qudushu, holiness)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그에게 바쳐지는 남성을 카데쉬라고 불렀다.

    3대 여신 중의 하나인 아스다롯 여신은 저녁 별의 여신이었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는 대로 이스라엘 여인들이 하늘의 여신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렸다고 하는 그 말은(44:19) 곧 아스다롯 여신을 가르킨 것으로 본다. 이 여신도 아낫여신과 같이 전쟁과 성의 여신으로 서로 혼동되어 분별없이 숭배되기도 했다.

    바알신의 다른 한 원수는 ’(yam) 신이다. 이 신은 해양을 주관하는 신으로 일명 리워야단이라고도 하는데 깊은 바다에 살면서 일곱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고 전해진다(74:14).

    또한 몰렉 또는 밀곰이라는 암몬인들이 섬긴 민족적인 신이 있었다. 이 신은 파괴적인 위력과 보호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에 이 몰렉 신이 많이 나오는데 이 당시에 사람들은 몰렉 신에게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여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였다(왕하21:6). 이들이 어린 자녀들을 몰렉에게 희생제물로 드리는 것은 어떤 서원에 대한 확약의 증표였다. 이처럼 서원의 확약으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여호와의 사사 입다에게도 보게 된다(11:31,39). 그리고 삿11:24에 보면 몰렉을 그모스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신들의 예배형식은 종교적 매춘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 신화는 극도의 잔인성과 비도덕성을 포함하고 있다. 어린이 제물과 뱀 숭배도 역시 지켜졌다. 이 종교는 퇴폐적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매혹됨으로써 큰 죄를 범하였다. 그 유혹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새로운 농경작물이 풍요롭기를 바랐고, 어리석게도 그들은 바알 제단에 매달림으로써 이것이 성취된다고 믿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가나안의 종교는 하나님의 대한 신앙과는 대치가 되는 퇴폐적인 관습들로 가득찬 종교였다. 고고학의 발견에 의하면 가나안의 곳곳에서 생후 얼마 안된 아이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종교들과 이스라엘은 유혹을 받으며 때로는 물리치기도 하였지만 가나안인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기도 하였다.

     

     

    b. 가나안 문화

     

    가나안은 물질문화가 진보하였다. 도시들은 훌륭하게 건설되어 가옥은 훌륭한 설계와 건축을 보였다. 건물의 바닥은 포장되었거나 회반죽이 발라져 있었으며, 성 아래에 있는 샘들과 연결되는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귀족들의 저택들은 농노들의 오두막집들에 둘러싸여 있어 봉건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나안인들은 통상을 잘하는 사람들, 목재의 대수출가들, 직물공업과 염색공업의 선도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구리, , 금을 사용하는 기술이 있었다. 특히 자기류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하였다. 그리고 애굽, 북방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구브로를 포함한 외국 나라들과 광범위한 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가나안의 최고의 업적은 물질 문명이 아니라 문자에 있었다. 주전 3000년대가 끝나기 전에 비블로스의 가나안인들은 이집트어를 본뜬 음절문자를 개발하였고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주로 아카드어로, 때로는 이집트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을 글을 쓰는데 필요한 몇 가지 다른 문자도 개발하였다. 이 문자들 가운데 선형(線形) 알파벳을 만들었는데 이 문자가 바로 알파벳의 선구가 되었다.

    이렇듯이 가나안은 훌륭한 문화로 광야에서 40년을 소비한 이스라엘 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진보된 문화에 흡수되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B. 각 사사들의 이름과 연대별 순서와 주요 업적

     

     

    문헌개요 :

    H.왈틴, 구약의 연대기도표, 성광문화사(1992.7.30), pp49-50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되는 자신들의 타락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이키기 보다는 계속해서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고 그들에게 평안한 삶을 허락해 줄 지도자를 세우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이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서 왕으로 계시지 않았고 자신들의 소견대로 행하는 때였다.

     

    1. 웃니엘

    이스라엘

    압 박 자 압제기간 개략연대B.C 성 경 사사들 지 파 평화기간
    메소포타미아 구산 리사다임 8 1385-1377 3:8





    1377-1337 3:9-11 웃니엘 유다 40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를 섬긴다(3:7).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8),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시켜 이스라엘을 지배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8년간의 압제가 심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반응을 보인다.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웃니엘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서 이스라엘을 압제에서 구출하고 40년 동안 태평하게 보낸다.

     

    2. 에훗

    압 박 자 압제기간 개략연대B.C 성 경 사사들 지 파 평화기간
    모 압 에 글 론 18 1337-1319 3:12-14







    1319-1239 3:15-30 에훗 베냐민 80

    두번째로 이스라엘을 압박한 나라는 모압이었다. 이들의 왕은 에글론이었으며 그는 여리고를 중심으로 삼아 18년 동안 이스라엘 노예로 삼았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다시금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두번째 구원자, 베냐민 지파의에훗을 일으키셨다. 에훗의 구원은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속임수를 써서 에글론 왕을 암살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에훗은 에글론에게 이스라엘의 공물을 바치러 왔다고 마음을 놓게 한후 선물을 전해주고 난 후 모든 신하가 방에서 물러갔을 때, 그는 왕에게 접근하여 칼로 찔러 살해했다. 칼날이 에글론의 등뒤까지 나가고 빼지 않은채, 그는 조용히 방을 나와 문을 잠근 후 탄로가 않을 동안에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에훗은 돌아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모압 맞은편 요단강 나루를 지키고 있다가 퇴진하는 모압의 군대를 쳐서 10,000명 가량을 죽였다. 이후 80년 동안 태평하였다.

     

    3. 삼갈

    압박자 압제기간 개략연대B.C 성 경 사 사 지 파 평화기간
    블레셋


    3:31





    1260-1250 3:31 삼 갈 납달리 10

    세번째 사사인 삼갈이 살았던 시기는 아마 80년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며, 그리고 그가 다른 사사와 동등하게 기록되었으므로 사사 중의 한 사람으로 족히 취급된다. 그의 승리는 개인적인 승리로 표현되는데, 600명이나 되는 블레셋 사람을 소를 모는 막대기 하나로 죽인 사실은 그의 놀라운 힘과 용기를 나타내 주고 있다.

     

    4. 드보라

    압박자 압제기간 개략연대B.C 성 경 사 사 지 파 평화기간
    가나안 야 빈 20 1259-1239 4:2-3





    1239-1199 4:4-5:31 드보라 에브라임 40

    드보라는 열 두 사사 중에서 독특한 여자 사사였는데, 그녀는 이미 전쟁 전에 사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선지자로 불리웠으며, 백성들은 상담을 하기 위해 그녀에게 나아갔다. 이렇게 그녀는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인고로 전투에 앞장 서기를 원치 않아 바락으로 하여금 이 일을 하게 하였다. 바락은 그녀가 도와 준다는 조건 아래 이를 승락하였고, 핍박을 가장 많이 받았던 스블론과 납달리로부터 10,000명의 군대를 모집하였다. 그는 군대를 다볼 산에 집결시키고 기손 강변에 있는 므깃도 서쪽에서 시세라와 전투를 벌였다. 후에 드보라의 노래를 보면(5:21), 싸움 도중 기손 강이 넘쳐 시세라의 병거차가 수렁에 빠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드보라와 바락의 승리가 가능해졌고 그들은 도망가는 적을 하로셋까지 뒤쫓아 갔다. 시스라는 하솔로 도망가던 중 바락의 고향 게데스에 사는 겐 사람 야엘의 천막에 피신하였는데, 그녀는 도와주는 척하다가 그의 머리에 말뚝을 박아 죽였다. 마침내 야빈 왕을 이겨, 이후 40년의 평화시대가 계속 되었다.

     

    5. 기드온

    압박자 압제기간 개략연대B.C 성 경 사 사 지 파 평화기간
    미디안 오렙,스엡,
    세바,살문나
    7 1199-1192 6:1-6





    1192-1152 6:7-8:35 기드온 므낫세 4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함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다. 이렇게 지나기를 7,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호소를 듣고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셨다.

    기드온은 므낫세의 마을 오브라에 살고 있었다. 그는 사사로 세움을 받자 먼저 바알의 제단을 헐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 요아스는 그의 이름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다. 이 일후에 그는 미디안 군을 물리치고자 그를 따르는 32,000명 중에서 300명만을 뽑아, 그것을 세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그 안에 햇불을 감추게 하고 나팔을 불 때에 삼면에서 항아리를 깨고 햇불을 밝혀 그들을 놀람과 공포 속에 있게 만들고, 쳐서 이겼다.

    고향에 돌아온 후 기드온은 왕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은 인간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군주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른바 신정(神政) 정치(政治)의 확고한 신앙에서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제사장이 달고 다니는 에봇과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 금귀걸이를 받아들이는 잘못을 범하였고, 후에 백성들이 이 물건을 숭배하게 되었으므로(8:24-27) 잘못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가 다스리던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태평을 누리게 되었다.

     

    기드온에게는 아들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러므로 인해 이스라엘은 혼탁하게 되고 만다. 기드온은 세습적인 왕을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첩의 아들(8:31)아비멜렉은 그의 어머니의 친척들의 후원을 얻어 스스로 왕이 되었다(9:1-6). 그의 방법은 자기의 적수라 생각되는 그의 70형제 중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살해하였는데, 막내 요담만이 이를 모면하였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에 의해 왕관을 수여받았는데, 그들은 자기 가문에서 왕이 나오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3년간 군림했는데, 그의 실제적 통치내용은 극히 한정된 것이었다. 3년 후, 요담의 저주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악함을 인하여 세겜 사람들에게 악한 신을 보내 반란을 일으키게 하신다. 세겜 사람들은 가알(Gaal)에게 지도자로 삼아 싸웠으나 가알에게 불리하게 되었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저항하는 무리를 죽이기 위해 데베스로 갔을 때 한 여인이 멧돌을 그의 머리에 떨어뜨림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6. 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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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9-1126 10:1-2 돌 라 잇사갈 23

    아비멜렉의 통치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사 돌라를 세워 23년을 다스리게 했다. 돌라는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이었으며,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여 사사가 되었다.

     

    7. 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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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6-1104 10:3-6 야 일 길르앗 22

    야일은 길르앗 사람이었으며 그에게는 아들이 30명이 있어 어린 나귀 30을 탔고 성읍 사십을 두었다. 이렇게 그는 흔치 않은 부를 가지고 있었다.

     

    8.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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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 몬
    18 1104-1086 10:7-9







    입 다 길르앗 6

    입다는 18년 간 이스라엘을 지배한 암몬군을 물리친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11:1). 이런 신분으로 그는 그 형제들에게서 쫓겨나서 가난한 잡류들과 같이 사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암몬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입다를 불러 자기들의 장관으로 삼았다. 이제 입다는 미스바에 진지를 두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싸우기 전에 먼저 암몬왕에게 사신을 보내었으나, 암몬왕이 거절하였다.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고 그는 암몬 자손에게 나아가면서 승리를 위해 서원을 하였다. 입다는 암몬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고 민닛과 아로엘 사이의 20개의 성읍을 점령하였다.

     

    9. 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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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0-1072 12:8-10 입 산 유 다 7

    입산은 7년 동안 베들레헴을 다스렸고 30명의 아들과 30명의 딸이 있었다. 타국으로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타국에서 여자 30명을 데려왔다. 그는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다.

     

    10. 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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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2-1062 12:11-12 엘 론 스블론 10

    엘론은 스불론 사람으로서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다.

     

    11. 압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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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2-1055 12:13-15 압 돈 에브라임 7

    비라돈 사람으로서 힐렐의 아들이다. 40명의 아들과 30명의 손자가 있어서 어린 나귀 70필을 탔었다. 그는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다.

     

    12. 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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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레셋
    40 1115-1075 13:1





    1075-1055 13:2-16:31 삼 손 20

    삼손의 아버지는 단 지파 사람 마노아였는데, 그는 그 지파 사람들과 같이 북쪽으로 이주하지 않았다. 삼손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그 출생이 예고되었으며, 나실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블레렛과의 경계인 소라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특별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있었으며 이는 특별히 삼손의 짜르지 않은 머리로 상징되었다. 그는 한 개인에게 그렇게 큰 힘을 부여할 수 있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위대성을 블레셋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삼손은 딤나의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고자 하였는데 부모들은 반대를 하였다. 그는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녀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사자를 죽인후 결혼을 위한 축제 동안에 블레셋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부로 하여금 삼손을 속여 답을 알아내어 수수께끼를 해결하였다. 이를 안 삼손은 약속했던 보상으로 블레셋 사람 30인을 죽여 그들의 겉 옷을 취하여 주었다.

    삼손은 첫번째 분노를 억누르고 신부에게로 돌아왔으나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이를 보복하기 위해 300마리의 여우를 잡아 한 쌍씩 꼬리를 햇불을 묶고 놓아서 블레셋 곡식을 다 태워버렸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신부와 장인을 죽여 앙갚음을 하였다. 그러나 삼손은 다시 그들은 살해함으로 보복하였다. 곧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삼손은 에담 바위 꼭대기에서 3,000명의 자기 백성에 의해 붙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삼손은 결박된 줄을 끊고 나귀의 새 턱뼈를 사용하여 1,000명의 적을 죽였다.

    이런 일 이후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다(15:20).

    20년 기간이 끝나갈 무렵, 삼손은 블레셋 지역을 다시 가사에 들렸는데, 여기서 그는 기생과 더불어 죄를 범하게 되었다(16:1-3). 그는 한 밤중에 일어나 블레셋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가사의 수비성곽을 뜯어내어 이를 헤브론으로 돌아오는 길의 언덕 근처에 갖다놓음으로 그들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그는 데릴라라는 하는 블레셋 여자에게 끌려 죄를 지었다. 데릴라는 블레셋 방백들로부터 보상을 약속받고는 삼손의 힘을 알아 내기 위해 유혹하였다. 그는 세번이나 거짓말을 했지만 마침내 머리카락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가 잠든 동안에 머리카락을 베어버렸고, 블렛셋 사람들에 의해 그는 두 눈이 빼어지고 포로가 되어 노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머리가 자라가면서 그는 복수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마침내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곤 성전에서 놀고 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고는 성전을 버티고 있는 두 개의 중심기둥을 뽑아 무너뜨려 그가 이전에 죽인 수보다 더 많은 적들을 자기의 죽음 그 순간에 죽일 수 있었다.

     

     

     

     

     

    C. 초기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징을

    언약과 연결시켜 논하라.

     

     

    문헌개요 :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4.3.25), pp190-243

     

     

     

    이스라엘에는 중앙 정부나 국가 체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강인함을 가지고 극심한 역경 가운데서 이스라엘은 이웃 나라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게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로서 살아왔다.

    이스라엘은 모든 지파가 혈통에 의한 친족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공통의 긴급사태가 있을 때마다 단합된 행동을 통하여 통일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이보다 초기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이유는 이들나름대로의 성스러운 전승들과 특색있는 제도들이 표준적인 형태를 획득하는 틀을 제공했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 보다 이들에게 특징을 부여하고 지켜준 것은 언약이었다. 이것은 이들의 전반적인 모든 면에 영향을 준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여호와의 택함 받은 백성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은혜에 응답하여 여호와와 언약을 맺어 그의 백성이 되고 그의 계명에 따라 살기로 하였다. 즉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다.

    이 언약이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연결시켰다.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유대는 자기 백성을 종살이로부터 구출하여 그들에게 땅을 준 주군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호의에 토대를 둔 유대였고,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영속적으로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직 그분만을 섬기며 그분의 계명들에 순종하는 가운데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군주에 대한 봉신의 관계와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스린다는 개념, 즉 구약과 신약의 중심사상인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비롯되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지파 조직은 여호와의 왕권 아래의 신정 체제였다.

    그러나 언약은 어떤 의미로든 동등한 당사자 사이의 협약이 아니라 봉신이 주군인 여호와가 제시한 조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또한 초기 이스라엘의 특징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밀의 복된 일들에 대한 부푼 기대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미래와 소망을 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리고 불순종하면 내쳐 버리겠다는 조건으로 그 규정들에 엄격히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언약은 그 규정된 의무를 준행하면 주군인 하나님의 은혜가 끝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확증을 가진 것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신앙의 독특성은 언약의 하나님 사상에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였다. 이들의 여호와의 의미는 다른 민족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지방의 자연신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다스리는 최고신으로 여호와를 받아들였다.

    이들의 신앙은 여호와 이외의 다른 어떤 신에 대한 예배를 금하는 유일신 신앙이었다. 이것은 언약의 성격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봉신은 오직 한 사람의 주군만을 섬길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역사상의 사건들에 뿌리를 박고 있었고, 고대 세계에서는 유일하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부르심에 대한 민감한 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의 동질성이 동질성을 가진 공동체를 만들고 통일성을 이루었다. 그리고 언약은 이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잇는 것이었으며 언약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의 통일이 형식과 내용이 결정된 것이었다.

     

     

     

     

     

     

     

     

     

     

     

     

     

     

     

     

     

     

     

     

     

     

     

     

     

     

     

    사무엘 상하

     

     

    A. 다윗 당시의 이스라엘 인근 국가들의 이름과

    위치를 그려보라.

     

     

     

     

     

     

     

     

     

     

     

     

     

     

     

     

     

     

     

     

     

     

     

     

     

     

     

     

     

     

     

    B. 이스라엘에 왕정이 생긴 이후 일어난 근본적인 정치, 종교, 경제 사회적인 변화를 논하라.

     

     

    문헌개요 :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264-319

    김희보. 舊約이스라엘, 총신대학출판부, pp183-235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247-285

     

     

    1. 사울왕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블레셋의 침략으로 붕괴되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느슨한 지파동맹 체제로는 대처할 수 없는 대적이었다. 이러한 침략자들 때문에 이스라엘은 좀더 강력한 지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초기의 이스라엘의 왕정은 확실히 이교 국가들을 모방하지 않은 독특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능한 옛 질서 그대로 유지했다. 사울은 왕이 아니라 지도자또는 사령관이었다. 즉 지파들의 선택된 군사 지도자로서 일해 주기를 바라는 바램에서 사울은 왕으로 인정되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내적인 체제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았다. 지파 조직은 과거와 다름없이 남아 있었고, 행정기구나 관료제도는 발달하지 않았다.

    사울은 이스라엘 종족 동맹의 옛 질서있는 종족들의 과거 특수한 위치에서 출발하였기에 이스라엘적질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이 이어받은 여호와 사상이 훨씬 더 중요했다. 여호와 사상은 남부의 종족들이 전승한 고유한 것이며 북부와는 독립적으로 전승해 나가는 사상이었다.

     

    2. 다윗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이었다. 그는 옛 체제와는 크게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권력기반은 지파동맹 체제가 아니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법궤를 옮겨 오면서 통일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삼게 된다. 그는 사울이 언약궤를 무시하고 제사장들을 추방한데 반해, 다윗은 공적인 국가 성소에 언약궤를 안치하고 제사장직도 확립하였다. 이러한 다윗의 조치는 각 지파의 민심을 예루살렘으로 쏠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궤를 위해 훌륭한 성전을 짓고자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삼하7:1-17).

    그리고 다윗은 정복사업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새로운 판도를 형성하게 되는데-동북쪽으로는 유브라데강까지, 남쪽으로는 에돔의 남단 이집트의 하수를 따라 홍해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전 지역이었다(15:18; 34:2-12). 바로 이러한 다윗 왕국의 국경선은 이스라엘이 강대국으로 변모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의 성격 자체가 옛 질서로부터 전면적인 변화의 조짐을 보여 주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환호로써 왕으로 추대된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영도되는 지파동맹이 아니라 왕권의 지배 아래 조직된 복잡한 왕국이었다. 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중심은 다윗 자신이었다.

    다윗의 행정적인 수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갓가 아셀을 제외한 각 지파에 그들을 관할하는 관장을 두었다고 지시되어 있는데, 그들의 의무에 대해서는 설명이 나와 있지 않다(대상27:16-22). 그는 또한 재무와 창고 그리고 다양한 농경부 위에 우두머리를 지명하였다(대상27:25-31). 이러한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분명히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하였으며,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맣은 공물이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종교적인 면에 있어서 다윗의 정책은 백성들의 눈에 이 국가가 이스라엘의 옛 질서의 진정한 계승자의 정통성을 부여받고 있다고 보이기를 원하는 생각에 따라 시행되었다. 그래서 그는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성소를 국가의 공식적인 기구로 육성하였다. 종교문제는 내각의 각료인 두 사람의 대제상장에 의해 처리되었다. 이 두 대제사장 밑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구체적인 과정으로 재조직 되었다. 제사장들은 24부분으로 나뉘어져서, 각 부분이 교대로 중앙 성소에서 1주일씩 봉직하도록 지정하여, 보통 1년간에 총 2주가 되도록 하였다(대상24:1-19). 또한 레위인을 먼저 가수들문지기관리와 판관으로 나누고 보통 제사장을 돕는 사람들로 구분하였다. 다윗은 백성들의 종교생활에 관심을 두었으며, 이런 식의 조직으로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효과적인 시중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다윗 자신은 모범적인 삶과 수 많은 자작시로서 종교의 중요성과 성장에 공헌하였는데, 그의 시 중에서 몇 가지는 공적인 예배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C. 비평학자들의 소위 친왕조 본문과 반왕조 본문을 구분하는 것을 비판하라.

     

    문헌개요 :

    글리슨 아처. 구약총론, 기독교문서선교회, pp324-325

    김정우. 歷史書硏究, 총신대학신학대학원 강의안, pp52-53

     

     

    합리주의 비평가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여러 시대의 저자를 밝혀내는데 있어서 서로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왕조를 설립하는 일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대립적인 입장이 주장되고 있는데, 사무엘상 7장 및 8장의 입장(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결핍된 것을 하나님께서 비난하시는 내용을 기록함)과 사무엘이 기름붓게 될 왕에 대한 은혜스러운 축복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는 9(특히16절의 입장)의 입장 등이다. 왕조를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전자를 반왕조적 본문, 찬성한다는 의미에서 후자를 친왕조 본문이라고 한다.

     

    1. 소위 반왕조 본문(삼상8; 7:3-8:22)

     

    사무엘의 아들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다스리나 부패했다. 사무엘의 지도력도 도전을 받는다. 이에 백성들은 자신을 다스릴 왕을 요구하고(8:4-5), 사무엘은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8:7). 백성들의 요청은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들이 여호와의 왕권을 거부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집트에서 나온 후 백성들은 계속 주의 옹권을 거부해왔다(7). 사무엘은 그 당시 고대 근동 아시아의 군주들이 행하고 있는 관습을 지적한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 사울 전에는 이스라엘에 상비군이 없었다. 중앙집권화된 세력은 독재를 유발시하게 된다. 왕권의 강화를 위해 강제 노역을 시키게 되고, 이것은 후대 분열의 씨앗이 된다. 백성들은 자신의 외정 문제 때문에 즉 블레셋 문제 때문에 왕을 구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신적 용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같이 삼상1-3, 삼상7,8,10,12; 삼상15; 삼하7; 왕상13:1-14:18; 왕상17-19; 왕하1-9; 왕하17;7-41; 왕하19-21 등도 반왕조적 예언자적 본문으로 비평주의자들은 언급한다.

     

    2. 친왕조적 본문(삼상9:1-10:16)

     

    사울은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다가 왕국을 발견하였다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 기사를 통속적인 전설로 본다. 그러나 문학적인 관점에서는 주인공을 늦게 부각시키는 기술이다. 이스라엘의 첫 왕이 베냐민 지파에서 뽑힌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여길 수 있다.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질투심을 중화시키고 있다. 사울의 외모가 부각되고 있다(10:23).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려 한다(10:1).

    이와 함께 다음의 본문들도 친왕조적 본문으로 비평학자들이 언급한다. 삼상4-6; 삼하6; 삼상9-11, 13-14; 삼상16-삼하5; 삼하8; 삼하9-20; 왕상1-2; 왕상3-11; 왕상12; 왕상14:19-16:34; 왕상20-22; 왕하8:16-17:6; 왕하18-25 등이다.

     

    3. 비판

     

    이러한 비평가들이 잘못 이해한 점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그릇된 동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무라시다고 해도, 그 사실로 인하여 그 백성들이 잘못 선택한 새 통치 형태에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해 세우신 인간적인 기구에 대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히브리 역사과정 속에서 인간의 실수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하나님의 반응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윗이 밧세바를 자기의아내로 맞아들인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스럽게도 하나님은 그녀에게서 난 아들 솔로몬을 그의 아들 중 가장 영광스러운 다윗의 계승자로 삼으셨던 것이다.

    또한 기사의 뒷 부분과 앞 부분을 연결시키는 언급이 나타남으로써 고등비평적 구분이 인위적이라는 사실이 강조되는데, 왜냐하면 때때로 이러한 언급들은 비평자들이 세워놓은 구분의 모든 겨예를 넘어서기 때문인 것이다. 가상적인 독특한 자료들의 어떤 특징적인 구절이 자주 반복됨으로써 모든 분석수법을 매우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열왕기 상하

     

     

    A. 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일어난 변화를 상술하라.

     

     

    문헌개요 :

    김희보. 舊約이스라엘, 총신대학출판부, pp236-256

    레온 우드. 이스라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320-337

    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286-311

     

     

    솔로몬의 통치 시대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였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다시는 맛볼 수 없었던 安寧과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그리고 이것은 평화로운 學藝의 만개를 가져왔다.

    솔로몬은 자기가 넘겨 받았을 것보다 약간 줄여 놓았지만, 대체적으로 왕국의 본질적인 체제는 손상되지 않고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그는 군사작전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보다는 외부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봉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평화 속에서 잠재력들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그는 동맹을 맺고자 많은 이방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주요 도시들은 요새화하여 군사기지로 만들어 국가의 안전을 유지하며 침략을 예방하였다(왕상9:15-19). 이 밖에도 병거 부대를 증강함으로써 자신의 군대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솔로몬의 진짜 재능은 산업과 교역의 분야에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치의 경제적 중요성을 알고 무역을 통하여 국가에 막대한 를 가져다 주었다.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번영하였고, 나라 전체의 생활수준도 급격히 향상되었다. 그리고 도시들도 발전하고 건설되었다.

    솔로몬의 부는 수많은 건설사업에 활용되었다.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이 사업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성전이었다. 성전은 두로 출신 건축가가 지었으며, 이 성전은 왕실 예배당으로 그리고 성전의 언약궤의 존재가 보여 주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성소의 역할도 하였다.

    솔로몬의 영화는 물질적인 것에만 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놀랄 만한 문화의 개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으며, 음악과 시편 영창도 성행하였으며, 지혜문학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의 천재적인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만성적인 재정 궁핍과 수많은 건설사업을 위해 노동력을 공급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그는 백성들의 원성을 산 무거운 세금과 강제노역에 의지하였다.

     

    솔로몬에 의해 취해진 어떤 변화들보다 훨씬 의미심장했던 것은 점진적이면서도 가차없이 이스라엘을 엄습한 내적 변혁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이 변혁은 실질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옛 질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성스러운 제도들과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갖춘 지파동맹은 왕조 국가에 길을 내주었고, 국민 생활의 모든 측면들은 발전적으로 조직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회의 전체 구조는 깊게 영향을 받았다.

    솔로몬의 국토의 행정상의 재편은 그 변혁의 절정을 이루었는데 지파 조직의 실제적인 종말을 알렸다. 씨족의 유대는 지속되었고 또 열두 지파 체제도 성례의 전통으로 존속되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지파들은 더 이상 지파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의 권위와 정치적 의무를 전혀 몰랐던 지파 사람들은 이제 무거운 세금과 징병의 의무를 지고서 정부의 각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조직되었다. 징병은 솔로몬 아래에서 육체 노동을 위한 징용으로 바뀌었다. 사회적 의무를 부과하는 실제적인 근거는 더 이상 여호와의 언약이 아니라 국가였다. 그리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일상 생활에서 언약의 율법이 그 타당성을 많이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보다 더한 것은 지파 사회의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농경과 목축 사회였던 이스라엘에 상업 및 공업이라는 상부 구조가 접붙여졌다. 이스라엘은 소농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고 도시 문화가 발전하였다.

    더우기 가나안족 주민을 흡수함으로써 봉건적 배경을 가진 언약의 율법이라는 개념조차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안에 들어왔는데, 그들에게는 계급 차별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동안에 부유한 계급이 성장하여 빈부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왕족과 귀족의 집안이 생겨났다.

    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면서 다윗은 국가를 언약 동맹의 여러 전통들과 결합시키고 그럼으로써 국가를 신학적으로 뒤삳침하기를 희망하였다. 솔로몬은 성전을 세우는 데에서도 이 정책을 밀고 나갔다. 언약궤는 왕조의 공식적인 성소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옛 체제의 초점이 새 체제에 의해 병합되어 조직되었다.

     

     

     

     

     

     

     

     

     

     

     

     

     

     

     

    B. 이스라엘(유다, 이스라엘)을 지배한 왕조와

    왕들과 특징을 상술하라.

     

     

    문헌개요 :

    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신행협회, pp214-219

    H.왈턴. 구약의 연대기표, 성광문화사, pp62-63

    에드워드 J.. 구약총론,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pp209-217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339-416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p258-405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을 때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이 다스린 햇수가 기록되며, 그들이 왕위에 오른 해()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왕과 유다 왕의 다스린 햇수를 서로 비교하여 계수할 때 쉽게 일치되지 않으며, 언뜻 보기에는 많은 오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잘못된 기록이기 보다는 유다와 이스라엘 나라에서 왕의 통치 기간을 셈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유다 나라에서는 처음에 즉위년(卽位年) 계산법을 택했다. 말하자면 왕위에 오른 해를 즉위년으로 하고 그 다음 해를 즉위 1년으로 계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유다 나라는 시종 즉위년 계산법을 따라 통치 기간을 계산한 것이 아니고, 처음 르호보암왕 때부터 여호사밧왕 때까지는 즉위년 계산법을 사용했고, 그후 북쪽 이스라엘과 결혼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깊이 결합되었을 때인 여호람 때부터 요아스까지 약4대를 걸쳐 이스라엘이 사용한 즉위년 비()계산법을 따라 계산했고, 그 후는 다시 즉위년 계산법을 따라 왕의 통치 연대를 계산했다.

    북쪽 이스라엘에서는 처음에 즉위년 비()계산법을 택했다. “즉위년 계산법은 즉위한 실제적 연도의 다음 해를 즉위1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적 통치 기간을 계산할 때는 그 앞의 즉위년을 소급하여 계산하는 반면에, 즉위년 비계산법은 즉위한 실제적 연도를 아예 즉위1으로 계산하기에 그 앞의 즉위년을 소급하여 가산할 것도 없으므로 그 즉위년을 따로 계산치 않는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 나라도 시종 즉위년 비계산법을 따라 통치 기간을 계산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의 통치 기간이나 그들의 상호 관련을 비교하기가 단순치 않으며, 보다 주의깊은 세심한 계산을 해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들이 한 해를 시작하는 첫달을 서로 다른 달로 시작하고 있다.그리고 전수되어 오면서 기록상 잘못된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왕위에 있어 아버지의 통치 기간과 아들의 통치기간이 서로 겹쳐졌기 때문이다.

     

    1. 북왕국의 왕조들

     

    931-909 여로보암 왕조(22년간)

    연 대 특 징 성 경
    931 -910 여로보암 북왕국의 초대왕,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룰 세워 자신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음 왕상11:42-14:31
    910 -909 나 답
    왕상15:25-28

    909-885 바아사 왕조(24년간)

    909-886 바 아 사 잇사갈지파 아히야의 아들이다. 수도는 디르사였으며, 나답의 부하로 있다가 쿠테타를 일으켜 왕이 되었다. 왕상15:27-16:7
    886-885 엘 라 바아사의 아들로서 2년을 통치했으며, 궁중 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술에 취해있을때 시므리에게 살해당하였다. 왕상16:6-14

    885년 시므리 왕조(7일간)

    885 시 므 리 엘라의 장관에 있다가 왕 엘라를 쳐죽이고 왕이 되었다. 군대장관 오므리에 의해 공격을 받자 불을 놓고 자살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주인을 살해한 자에게 붙여졌다. 왕상16:15

    885-841년 오므리 왕조(14년간)

     

    885-874 오 므 리 엘라왕의 군대장관으로 있었다. 시므리의 반란시에 백성들의 지지로 왕이 되었다. 세멜에서 산을 사서 그 위에 성을 건축하고 사마리아라 하고 수도로 하였다. 북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강대한 때였다. 왕상16:15-28
    874-853 아 합 오므리의 아들이다.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종교로 받아들이고 신전을 짓기도 하였다. 엘리야와 동시대인.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왕상16:28-22:40
    853-852 아하시야 아합의 아들. 에시온 게벨에서 파선된 배를 재건하여 다시스와 무역하기 원함. 왕궁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엘리야의 예언대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음. 왕상22:40-왕하1:1
    852-842 여 호 람 아합의 아들. 엘리사가 활동하던 시기. 바알의 주상을 제거. 아람과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장군 예후의 활에 죽임을 당하고 나봇의 포도원에 던져짐. 왕하3:1-9:25

     

     

     

     

     

    841-752년 예후왕조(89년간)

     

    841-814 예 후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 숭배를 근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숭배자들을 살해함. 그러나 잔인한 방법으로 비난을 받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완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난 받음(10:29,31) 왕하9:1-10:26
    814-798 여호아하스 아람군대의 공격을 받을때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음 왕하13:1-9
    798-782 요 아 스 엘리사의 예언대로 부왕이 잃었던 성문들을 아람왕에게서 빼앗고 세번쳐 이김. 유다와 요아스와 싸워 승리함. 왕하13:10-14:16
    793-753 여로보암2 황금시대. 악을 떠나지 못하였으나 통치자로서 유능한 자였음. 선지자 호세아,아모스 활동 왕하14:23-29
    753-752 스 가 랴 ()에 오른지 6개월만에 반역이 일어나 살룸에게 죽음. 왕하14:29-15:12

    752년 살룸 왕조(1개월)

    752 살 룸 예후의 왕가를 무너뜨렸으나 불과 한 달동안 왕위에 있다가 혁명을 일으킨 므나헴에게 죽음 왕하15:10-15

    752-740년 므나헴 왕조(12년간)

    752-742 므 나 헴 앗수르 왕 불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을때 일천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침. 왕하15:14-22
    742-740 브가히야 부하인 군대장관 베가의 반란으로 죽음 왕하15:22-26

    752-732년 베가 왕조(20년간)

    752-732 베 가 유다와 싸우려고 수리아와 동맹. 디글랏 빌레셀은 북방 팔레스틴을 침입하여 납달리를 점령. 왕하15:27-31

    732-722년 호세아 왕조(10년간)

    732-722 호 세 아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베가를 죽이고 왕이 됨.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함 왕하15:30-17:6

     

    2. 유다 왕국

     

    1) 르호보암(931-913, 열왕기상14:21-31, 역대기하10-12)

    41세에 왕이 되어 17년간 다스렸다.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 남색하는 자를 허락하였다(왕상14:23-24). 전쟁들에 시달렸는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애굽의 시삭의 침략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는 계속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 애굽의 시삭의 침략에는 큰 피해를 입었다(왕상14:25-26). 즉 그는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솔로몬 때에 만든 금방패까지 다 빼앗겼다.

     

    2) 아비얌(913-911, 왕상15:1-8, 대하13:1-22)

    아비얌은 북방 이스라엘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40만의 군대로 80만의 여로보암의 군대를 이겼다. 이 전쟁으로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남쪽 종교 중심지인 벧엘을 점령했고 몇 성읍을 빼앗았다.

     

    3) 아사(911-870, 왕상15:9-24, 대하14-16)

    아사는 41년을 다스렸으며, 남방 왕국에서 처음으로 종교적으로 선한 왕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우상숭배를 꾸짖고 드디어 그의 태후의 위()까지도 폐하여 버렸다.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살랐으며,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하는 자들을 그땅에서 제거해 버렸다. 애굽 군대를 이기고 선지자 아사랴로 부터 사기를 얻은 후 그의 재임15년에,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세우기 위해 유다와 베냐민 사람을 불러 모았는데 여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전투에서 노략하여 온 소 700마리와 양 7000마리를 번제로 드렸다. 또한 성전에 새로운 물품을 더 장비하고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세웠다. 그러나 그는 이전 가나안 사람의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자만심을 갖게 된다. 자기를 꾸짖는 선지자 하나니를 투옥한다. 또한 발에 병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의원들을 의지하였다.

     

    4) 여호사밧(873-848, 왕상22:41-50, 대하17-20)

    25세에 왕이 되어 35년 간 다스렸다. 이중 3년간은 아버지와의 섭정기간이었다. 그는 부왕의 뒤를 이어 개혁운동을 계속했다. 바알 제단을 없앴으며 또한 산당을 어느 정도 제거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레위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명령을 내려 유다 전체에 율법서를 가르치게 하였다. 여호사밧의 훌륭한 신앙은 모압, 암몬, 에돔의 세 동맹이 공격을 가해온 데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침략을 알게 된 여호사밧은 실망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금식과 기도의 시간을 선포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응답하시고 한 선지자를 통해 승리를 약속한 말씀을 하셨다.

    여호사밧은 재판절차를 개선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오므리 가문과 동맹하였다. 그러나 이 동맹으로 인해 그 아들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하게 하여 그의 어머니 이세벨의 방식을 좇음으로써 비극을 초래하였다. 또 세번이나 이스라엘 왕을 도와 주다가 죽을뻔 하기도 하였으며, 배가 파선되기도 하였다.

     

    5) 여호람(853-841, 왕하8:16-24, 대하21)

    그의 부왕은 하나님 눈에서 볼때 훌륭한 왕 중의 하나였는데 여호람은 악을 행하였다. 그 이유는 분명 사악한 아달랴와의 결혼때문이었다.

    그가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범한 비극은 그의 여섯 형제를 죽인 것이다. 그리고 에돔에 의한 반란과 립나 성읍의 반란이 일어났다. 블레셋과 아라비아인들의 침략으로 경제적인 손실을 겪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의 죄로 인해 엘리야가 한 경고에 따라 큰 병을 앓다가 죽었다.

    6) 아하시야(841, 왕하8:25-29; 9:27-29)

    아하시야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일 년도 채 못다스렸다. 그는 가족의 막내로서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공격 당시 홀로 생존하였었다. 아버지의 악한 길로 따라갔는데, 어머니 아달랴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예후의 습격으로부터 이스르엘로 도망하였는데 그후 예후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마침내 므깃도에서 살해당하였다. 그의 신하들이 이 왕의 시체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장사하였다.

     

    7) 아달랴(841-835, 왕하11:1-16, 대하22:10-23:15)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이세벨의 딸이었다. 남편을 조장하여 그의 형제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또한 유다에 바알 제단을 설치하려 했는데 큰 반대에 부딪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자기 자신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아하시야의 아이들을 살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하시야의 누이에 의해 구출된 요아스가 7세가 되었을때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유다국민들의 칼에 죽었다. 이때 이후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 왕국과의 연락은 끊어지고 얼마동안 그 두 관계는 평행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8) 요아스(835-796, 왕상12, 대하23:16-24:27)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힘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고, 여호야다를 통하여 종교적 개혁을 착수하였다.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우상을 깨뜨리며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혼자 통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는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할 계획을 세웠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온 백성들에게 연보를 거두게 했다. 성전의 수리는 오나성되었고 매일 드리는 번제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호야다가 죽자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것을 허락을 하였으며 이를 꾸짖는 여호야다의 아들을 돌로 쳐죽이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람왕 하사엘로 하여금 유다를 치게 하고 유다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드디어 그는 그의 부하들의 반란으로 죽었다.

     

    9) 아마샤(796-767, 왕하14:1-20, 대하25)

    아마샤는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29년을 다스렸는데 마지막 24년은 그의 아들 웃시야와의 섭정이었다. 아마샤는 그의 아버지와 같이 생애와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지만 모든 산당을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요아스왕 말기부터 혼란하여지고 약하여진 유다왕국을 정리하여 나라를 굳게한 후 그는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그는 국방을 든든히 하고 에돔을 공격하기 이하여 30만의 군대를 조직하고 또 이스라엘에서 10만의 용병을 고용했다. 그런데 어떤 선지자의 충고로 용병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여 돌려 보내고 에돔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였으나 이 전쟁에서는 크게 패하여 예루살렘성이 훼파하고 자신이 포로로 잡혀갔다. 아마샤는 유다로 돌아온 후 모반을 당해 피살되어 그의 웃시야가 대신 왕이 되었다.

     

    10) 웃시야(아사랴, 791-739, 왕하14:21-22; 15:1-7, 대하26)

    아마샤의 아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을 다스렸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많은 경우에 아사랴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유다의 열왕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유능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는 사실 유다왕국을 부강한 민족국가로 일으킨 강력한 수완의 왕이었다. 그리고 북방 이스라엘을 크게 부강케 했던 여로보암 2(793-753)와 대등되는 인물이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이 죽은 후 그는 주변 열국들에게 있어서 여로보암의 위치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유다 왕국이 강하여지자 교만하여졌고 백성들도 물질주의 기울어졌다. 마침내 웃시야는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무시하여 이때문에 그는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살면서 그 아들 요담에게 왕국을 관리케 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그는 마침내 문둥병으로 죽었다.

     

    11) 요담왕(739-731, 왕하15:32-38, 대하27)

    요담왕은 16년간 유다를 치리하였다. 그는 부왕의 좋은 점을 본 받아 신앙적으로 비교적 경건했었다. 그리고 많은 건축공사도 완성시켰으며 군사력도 계속 유지하였다. 웃시야왕이 죽은 후에 암몬이 배반하려 했으나 그는 그들을 계속 제압하고 조공을 받는데 성공했다.

    요담은 신앙적으로는 큰 허물이 없었고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걸어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계속 유지한 임금이었으나 백성들의 죄악을 다스리는데는 실패했다. 웃시야 때부터 사치에 기울어지던 유다백성들은 점점 더 부패해졌다.

    말년에 다메섹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는 점점 세력이 강하여지고 있는 앗수르를 대항하고자 하여 먼저 그 동맹자인 유다왕 요담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드디어 요담왕이 은 후 그 아들 아하스는 이러한 어려운 형편 중 왕위에 오르게 됐다.

     

    12) 아하스왕(731-715, 왕하16:11, 대하28)

    아하스는 왕위에 올라 16년을 치리하였으나 그의 통치기간에 유다왕국은 심피 약해진 나라가 되었다. 북쪽에서는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서쪽과 남쪽에서는 블레셋과 에돔의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 아하스왕은 오직 앗수르만을 의지하는 친 앗수르 정책을 견지했으나 그 앗수르 역시 유다를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롭게 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계속 그에게 그의 정책의 잘못을 권고하기도 했으나 그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하스는 가나안의 모든 우상을 다시 섬긴 지도자였다. 그리고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메섹에 가서 그곳의 우상의 제단을 본떠다가 그것을 예루살렘에 두고 제사를 드릴 뿐만 아니라 성전의 놋제단을 그 우상의 제단 북편에 두었으며 성전의 기명들을 뜯어내고 성전을 패쇄해 버렸다.

    13) 히스기야(715-686, 왕하18:1-20:21, 대하29:1-32:33)

    히스기야는 유다 여러 왕 중에 가장 훌륭한 왕 중의 하나였다. 그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성전의 문을 다시 열고 성전을 정결케하고 모세의 법을 따라 번제와 화목제의 큰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킬것을 명했다. 모든 산당을 훼파하고 모세 때부터 있었던 놋뱀까지도 부쉈다.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반 앗수르적이었다. 한때 앗수르의 산헤립왕이 쳐들어 왔을때 그는 이사야의 권고에 용기를 얻어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 185천명의 적군이 죽는 기적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죽게 되었을때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15년의 생명의 연장과 더불어 앗수르의 손에서의 구원을 약속받았다. 이때 그는 일영표가 10도를 뒤로 물러가는 이적을 보기도 했다. 병이 나은후 바벨론왕의 사신이 방문하였을 때 그는 세속적인 방법으로 나라의 부강을 자랑하고자 군기와 무장을 자랑하며 은과 금의 보물을 자랑했다. 이로 인하여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선지자 이사야로 부터 듣게 되었다.

     

    14) 므낫세(686-642, 왕하21:2-16, 대하33:2-10)

    므낫세가 왕이 된 것은 12세 때였다. 그후 55년간을 왕위에 있음으로 남과 북의 이스라엘 왕들 중에 최 장기간 왕위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는 유다왕국으로 심히 부패케 한 때이기도 하다.

    그는 부왕이 헐어버린 신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의 단을 다시 세우며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고 몰렉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려 불 가운데 지나게 하며 점치고 사술을 행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을 반대하는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리게 한 자였다. 그리고 완전히 앗수르에 예속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의 징계가 그에게 주어졌다. 쇠사슬로 결박되고 갈고리에 꿰어 잡혀가는 비참한 포로의 신세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는 다시 앗수르를 섬기며 조공을 바칠 것을 서약하고 유다로 돌아왔다.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그는 여호와께로 돌아와 크게 겸비하여 기도했고 모든 우상을 제하며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백성들로 여호와를 섬길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15) 아몬왕(642-640, 왕하21:19-26)

    아몬은 므낫세의 위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2년간의 그의 정치는 그 부왕의 타락한 정치의 반복에 불과하였다. 마침내 궁중의 신하들의 반역으로 죽었다.

     

    16) 요시야(640-609, 왕하22:1-23:30)

    요시야는 여덟살의 어린 나이로 아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물론 그 배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어서 요시야 왕을 충성으로 섬겼다. 그의 치리기간 31년은 참으로 크게 부흥하고 발전하던 시기로 유다 왕국 창건 이래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보아 좋겠다. 그는 모든 우상을 멸하는 숙청작업에 있어서도 남방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의 온 이스라엘 우상을 멸하였다.

    특히 성전수리 중 율법책을 발견하고 온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하였다. 그는 히스기야왕 때보다도 철저히 개혁을 하였고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사사시대 이후 가장 크게 지켰다.

    그러나 므깃도에서의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17) 여호아하스(609, 왕하23:31-33, 대하36:1-4)

    여호아하스는 요시야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요시야왕이 므깃도 전투로 전사한 후 백성들은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므깃도에서 요시야왕을 죽인 애굽의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제거하고 그의 형인 엘리야김으로 왕을 삼게 하고 그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치게 했다. 여호아하스는 3개월만에 폐위되었을 뿐만 아니라 애굽으로 포로되어 가서 거기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벌써 예레미야 선지가 예언한 그래로였다.

     

    18) 여호야김(609-597, 왕하23:34-24:7, 대하36:4-8)

    여호야김은 애굽왕 바로 느고의 직접적인 임명으로 유다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애굽에 바칠 조공을 위하여 백성들에게서 많은 것을 늑징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궁전에 만족치 않고 많은 재물을 소비하고 백성들의 노력을 동원하여 더 크게 궁전을 지었다. 또한 백성들을 압박하여 무죄한 피를 많이 흘렸다. 이에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선지자 하박국이 신랄히 경책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그는 선지자 우리야를 죽였고 또 예레미야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의 보호로 죽이지 못했다. 특별히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의 두루마리를 빼앗아 불에 던져 태우는 암흑정치를 감행했다.

    그는 느브갓네살을 배반하여 느브갓네살로 부터 침략을 받고 여호야김은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19) 여호야긴(597, 왕하24:8-16, 대하36:9-10)

    여호야긴의 왕위는 불과 3개월 10일 뿐이었다. 즉 느브갓네살 왕이 다시 예루살렘에 쳐 왔을때 그는 그를 바벨론으로 끌어가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대신 왕으로 세웠다. 이때 그와 더불어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후일에 유명한 선지자 에스겔도 본래는 이때에 잡혀간 포로 출신 중 한 사람이었다.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은 그래도 후한 대우를 받았고 마침내는 감옥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는 다른 나라들에서 잡혀 온 왕들보다 높임을 받아 일평생을 바벨론 왕궁에서 먹으며 일용할 모든 것을 종신토록 공급받았던 것이다.

     

    20) 시드기야(왕하24:17-25:21, 대하36:11-21)

    여호야긴이 잡혀간 후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은 그의 숙부 맛다니야를 세워 왕으로 삼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597-586)로 고쳤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유다왕국의 왕이 되기는 하였으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왕이라기보다는 섭정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시드기야의 왕위는 확고한 것이 못되었고 통치자로서의 그의 능력도 매우 부족하였다. 그는 바벨론왕의 세움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반 바벨론적인 관원들과 백성들의 압력으로 불안한 입장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국가의 혼란은 더욱 심하여졌다. 마침내 시드기야는 반바벨론파와 친애굽파의 압력으로 바벨론을 배반하게 됐다.

    이로 인하여 느브갓네살왕은 유다를 공격해 와서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도망가는 시드기야왕을 잡은 바벨론왕은 그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뽑아버린 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시드기야는 거기서 죽는 날까지 옥에 갇혀 있었다.

     

     

     

     

     

     

     

     

     

     

     

     

     

     

     

     

     

     

     

     

     

     

     

     

     

     

     

    C. 열왕기 저자가 언급한 다양한 선지자들의 사역을 논하라.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은 상술하고, 선지자들이 왕정 시대에 끼친 영향을 논하라.

     

     

    문헌개요 :

    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신행협회, pp214-219

    H.왈턴. 구약의 연대기표, 성광문화사, pp62-63

    에드워드 J.. 구약총론,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pp209-217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339-416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p258-405

     

     

    선지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시고 그분을 알도록 부르신 사람이었다. 여러 다른 선지자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성격 면에서도 매우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친밀함을 통해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을 갖고 있던 선견자였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도록 불렀다. 그들은 종종 그 나라 역사에서 특정한 위기의 시점에 나타난다. 너무나도 자주 백성들은 나태한 길, 패역한 길로 나가면서도 하나님의 그들의 회개와 그들과의 언약을 지킴의 상징인 의식과 제사들이 그러한 것들의 대체물로 이용되기를 바라곤 했다.

    각 선지자들은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비록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특정한 기본적 주제를 담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여전히 역사를 다스리고 계시며, 그가 그의 백성을 회개하도록 부르시고, 도덕과 정의는 매우 중요하고, 따라서 미래에는 심판과 소망이 모두 있으리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열왕기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선지자들을 보면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왕상11:29), 하나님의 사람(왕상13:1),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왕상13:11), 하나니의 아들 예후(왕상16:1,대하19:2), 이세벨에 의해 죽임 당한 선지자들과 오바댜가 숨긴 선지자 일백 인(왕상18:4), 디셉 사람 엘리야(왕상17:1), 한 선지자(왕상20:13), 선지자의 무리 중 한 사람(왕상20:35),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왕상22:8), 거짓 예언을 한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와 모든 선지자(왕상22:11), 사밧의 아들 엘리사(왕상19:19), 가드헤벨 아빗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왕하14:25), 여선지 훌다(왕하22:14) 등이 있다.

     

    1. 선지자 엘리야(왕상17-19,21, 왕하1:1-2:11)

     

    문헌개요 :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351-354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p287-290

     

    아합의 재임 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탁월한 선지자가 살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다. 이 선지자의 많은 행적 기록이 없었다면, 아합과 이세벨에 관해서도 많은 부분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아합왕에게 수년동안 우로가 없는 큰 가뭄을 펀포하고 무러나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까마귀가 난라주는 떡과 고기로 연명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돈땅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와 그의 아들을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기적으로 먹인 일과 다음 그 아들이 병들어 죽은 후 그아들을 기적으로 고친 일이다.

    두번째는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계속하여 아합은 엘리야의 탓으로 돌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엘리야를 죽이려 했다. 마침내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에 모으게 하고 참 신은 여호와냐 바알이냐 라는 일대 격전이 벌어졌을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단을 태우며 도랑에 채운 물을 핥게 하던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세번째는 자기를 죽이려 하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가는 도중 시민이 피곤하여졌을때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나타나셨던 일과 드디어 호렙산에 이르러 한 산에 섰을 때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차례로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네번째는 나붓의 포도원 사건이다.

    다섯째는 난간에 떨어진 아하시야왕의 죽음의 예언이다.

    여섯째는 그의 승천의 기록이다. 그것은 위대한 선지자의 생애 마지막의 찬란한 막을 내리는 영광스러운 장면이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에게 끼친 주요한 충격은 이세벨이 조장한 바알-멜칼트 제단을 격렬히 반대하는데 있었다. 그가 이룬 전체 효과는 추적하기 어렵지만 분명 상당한 것이었다. 이세벨이 위협했을 때 그가 도망하지 않았다면 더 큰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근이라는 전체적 영향, 갈멜 산에서의 불시험, 그리고 후에 엘리사가 행한 충성스런 임무 등은 오랫동안의 결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엘리야가 살아서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 상황은 더욱 더 극심해졌을 것이다.

     

     

    2. 엘리사

     

    문헌개요 :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358-359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p287-290

     

    엘리사는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엘리야와 같이 성스러운 임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엘리야의 영감이 두 배를 갖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활동기간은 엘리야보다 더 길었다. 여호람의 재임 초기에 시작하여 예후와 여호아하스를 통과하여 요아스 때에 죽었으니 대략 50년의 기간이 된다. 그는 활동 상 엘리야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수행하는 방식이 좀 달랐다. 그의 대조적인 배경에 발맞추어 그는 자기 성읍이나 궁중에 때로는 왕의 무리들과 함께 거하였다. 또한 엘리야는 기분에 따라 큰 용기를 얻거나 아니면 죽음으로까지 절망하곤 했는데, 엘리사는 자제력과 침착한 사람으로서 극적인 시험이나 언짢아 하는 장면이 없다. 역시 엘리야와 대조적으로 자기가 만난 사람을 도와주고 고쳐주며 위로를 주는 데에서 기적이 나타난 것을 보면 엘리사는 백성들의 필요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성경은 엘리사에 대해 18개의 예화를 연이어서 기록하고 있다. 더러운 물을 음료수로 맑게 만든 일, 자기를 비웃은 아이를 꾸짖은 일, 과부에게 기름을 주어 빚을 갚게 한 일, 친절을 베풀었던 수넴 여인이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에 그 아이를 다시 살린 일, 독초가 섞여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한 일, 기근 당시 백 명의 젊은 선지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증가시킨 일, 거짓말을 한 자기 종 게하시에게 문둥병을 선고한 일, 요단 강에 빠진 도끼자루를 다시 구한 일, 수넴 여인을 위해 왕으로 하여금 그 여인에게 속했던 땅을 돌려주도록 주선한 일, 하사엘을 다메섹에서 왕으로 기름붓고, 여호람의 장관 예후를 사마리아에서 여호람의 후계자로 기름부은 일, 그리고 훨씬 후 요아스 재임 시 아람 사람을 세번 이길 것이라고 예언한 일 등이다.

    엘리사의 주요 관심 중의 하나는 젊은 선지자를 교육시키는 일이었다. 엘리야가 이 계획을 착수하여 길갈, 벧엘, 여리고에 학교를 세웠는데, 엘리사는 이를 계속하여 더 확장시켰다. 그는 선지자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 생도들의 무리 속에 자주 있곤 하였다. 그의 목적은 엘리야나 자기와 같이 진정한 선지자 사명을 할 수 있는 훈련된 사람을 배출하는 것이었다. 바알을 숭배하는 삭막한 이스라엘에게는 이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3. 아모스, 호세아

     

    문헌개요 :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366-368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p302-312

     

    아모스는 유다 백성으로 드고아의 목자였으나, “여로보암 시대에 하나님의 경고를 일으키기 위해 북쪽 이스라엘로 보내졌다. 그러나 호세아와는 달리 남방 유다 출신으로 북방 이스라엘에 와서 활동한 선지자였다. 호세아 역시 이스라엘 백성으로 여로보암 시대에 예언하였다. 아모스가 웃시야 왕 때 활동한 것에 반해, 호세아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 유다 왕들 동안에 계속 활동했다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호세아는 아모스 보다 약간 늦게 시작한 것 같다. 여로보암 통치때의 특징인 번영은 향락, 나태, 죄악으로 이끌고 갔는데 이 선지자들은 이 세가지를 모두 저주하였다. 호세아서의 많은 부분은 자기의 방탕한 부인으로 인한 결혼의 슬픈 경험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는 자기 부인의 불충성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충성한 것으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호세아는 개인적인 죄악들을 탄신하며 견책했다면 아모스는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본다.

     

     

    4. 이사야

     

    문헌개요 :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404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p379-380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왕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활동을 하였다. 그는 웃시야왕이 죽던 해부터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에 이르는 비상한 때에 선지자의 임무를 감당하였다. 그는 아하스왕 때에 유다가 앗수르와 서로 동맹하는 행위를 신랄하게 경고하며 반대했다. 또 히스기야 때에 이르러서는 전과는 반대로 유다가 앗수르를 항거하기 위하여 애굽과 동맹하는 행위를 적극 반대했다. 그러나 이사야는 왕이 도움을 구할 때마다 힘을 다하여 그를 도왔다. 그는 일찌기 경건한 요담과도 교섭이 있었고, 히스기야가 단행한 개혁에도 많은 관계가 있었다. 이사야를 반대한 아하스에게조차 그의 영향은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어떻게 해서든지 깨닫게 하도록 힘을 썼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심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의 백성과의 간격이 너무도 큰 것임을 그는 탄식하며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그는 구속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바라보며 회개할 것을 절규했다. 구속주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속죄의 큰 역사는 후일 고난의 종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면서 그 백성들을 격려한 것은 그의 설교의 절정을 이룬다.

     

     

    5. 미가

     

    문헌개요 :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404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380-381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의 선지자로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였는데, 분명 이사야 보다 약간 후에 시작하여 계속 같은 시대에 활동하였다. 그는 모레셋 마을 출신이었다. 그는 이사야와 같이 궁정에 있었던 사람으로 표현되지 않지마, 예레미야에 의하면 특히 히스기야왕은 미가 선지의 경고를 받자 크게 두려워 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며 회개하였다고 했다.

    미가의 주요 메시지는 백성들의 죄악에 관한 것이었다. 사회적인 부조리와 여호와에 대한 불충성은 특히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강조점과 장래 징벌에 대한 경고는 이사야의 말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6. 요나

     

    문헌개요 :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 pp312-314

     

    요나 선지자는 여로보암 2세의 통치의 그 어느 기간에 활동했던 선지자다. 그는 이스라엘의 스불론 땅 나사렛 근처에 있는 가드헤벨 출신으로 그 아버지의 이름은 아밋대라고 했다. 그가 니느웨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들이 크게 회개하고 여호와의 종교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서 이방에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으나 더 깊이 생각한다면 이제 앞으로 이스라엘이 포로되어 앗수르에 가게 될 날이 멀지 않음으로 그를 먼저 보내어 이스라엘이 포로되어 앗수르에 가게 될 날이 멀지 않음으로 그를 먼저 보내어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을 준비케 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또한 이스라엘은 부강하고 호화로워짐으로 여호와를 떠났다면 앗수르는 환란과 공포로인하여 여호와 앞에 회개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역대기 상하

     

     

     

    A. 역대기와 사무엘-열왕기를 비교하라.

    목적, 범위, 촛점에서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상세히 밝히라.

     

     

    문헌개요 :

    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신행협회, pp199-219,386

    에드워드 J.. 구약총론,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pp209-217

    글리슨 아처. 구약총론, 기독교문서선교회, pp322-329,464

    톰슨2주석성경. 기독지혜사,

    셀프성경. 아가페,

    바울성경연구씨리즈,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역대상하

     

     

    유대문학에서 동시대 내용을 다룬 두가지 귀중한 역사서가 바로 사무엘-열왕기와 역대기이다. 이들은 유사점도 있지만 뚜렷한 차이가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잘 읽어보면 확실히 한 사람이 이 두책을 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권에서 나타나는 역사를 보는 관점과 역사의식이 명확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1. 사무엘-열왕기

     

    사무엘상·하는 원래 구분이 없는 한권의 책이었는데 칠십인역에서 번역된 분량이 많아졌기 때문에 두권으로 나누어 [1,2왕국서]로 불려졌고, 열왕기서는 [3,4왕국서]로 불려졌다.

     

    1) 목적

    사무엘서의 목적은 다윗 왕조의 신적인 기원을 밝히고 사사시대에서 왕국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선지자들이 담당했던 역할을 밝히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사무엘의 역할이 무엇이었으며, 사울왕과 다윗왕이 어떻게 왕이 되었고 정치를 하였는가를 기록하려는 것이다.

    열왕기서는 단순한 일반적인 역사 기록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 성쇠가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 如何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백성의 지도자가 성공하고 왕국이 평안을 갖게 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하나님을 어떻게 숭배하는가에 달려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다.

     

    2) 범위

    사사 통치 시대가 끝나고 왕이 통치하는 왕정정치로부터 통일왕국과 분열왕국 그리고 두 왕국이 멸망당하는 때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3) 촛점

    사무엘서에서는 왕권이라는 주제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역사의 중심 주제로, 그들로 하여금 왕이신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하도록 하시는데 매우 놀랍게 사용하신다는 점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보존된 기사를 통해 인간 통치자들이 어쩔 수 없는 불완전함을 보여 주신다. 그러나 오실 분이신 왕 메시야는 완전한 통치자가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역사적 선지자주의를 연결시키는 책으로써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적 사명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남쪽 유다 왕국에 관하여는 다윗의 표준에 충실했던 왕들을 특히 저자가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죄할 일이 있으면 분명히 정죄하였다는 사실과 또한 포로된 것도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사실을 저자는 분명히 밝히려 하고 있다.

     

    2. 역대기

     

    1) 목적

    역대기의 저자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회복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여 이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즉 그는 아마도 왕들의 시대에 대한 이 기사들을 특별히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히브리인들이 원래 그들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건설하도록 하기위해 편집한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과거에 일어난 이 이야기들을 통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고, 새로운 예배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지침들을 제공해 주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2) 범위

    인류의 조상 아담 이후부터 유다 백성이 포로에서 돌아올 때까지 계약 백성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다윗 치하의 연립 왕국에서 출발하긴 하지만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된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자세히 이야기 하고 있다.

     

    3) 촛점

    이 역대기의 주된 관심사는 역사의 계속성 곧 과거 역사와의 연결성이다. 이들에게 주어졌던 과거의 역사가 현재 이스라엘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족장들이 역사를 시작한 이후로 깨어지지 않은 역사의 흐름이 있음을 크게 강조한다. 따라서 족보에 대해서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와 같이 변함없이 지속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며, 회복된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 다윗 때부터가 아니라 창세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천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과거와의 연속성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으로 시작되고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에 대한 순종 여부가 절대적인 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약속된 메시야를 소망하라고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상하면서, 다윗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3. 열왕기와 역대기 비교

     

    역대기 저자의 저술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의 재해석적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그의 사상은 후기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이에 대해 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 중 공통된 견해를 종합해 보면 응보사상, 다윗통치이념, 예루살렘 우위성, 온 이스라엘 개념, 반사마리아 논쟁, 역사 속의 신의 섭리, 유다 민족주의, 메시야 왕권사상, 진정론적 사상, 거룩한 전쟁관 등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역사를 자기 시대에 상응하는 면만 선택하여 부각시킨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시대적으로 중복되는 사무엘-열왕기서와 역대기와는 시각을 달리하는 면이 많다.

    역대기 저자는 사무엘서나 열왕기에서는 기록되지 않는 설교체의 연설을 많이 소개하고있다. 역대기에 나타난 성전 건축기사는 열왕기에 나타난 기사보다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사 관 선지자적 관점에서 객관적 기술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주관됨
    제사장적 관점에서 주관적 기술
    역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기술대상 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의 역사 유다 중심의 역사
    관심점 왕권의 운명
    전쟁에 관한 상세한 기술
    다윗계보의 연속
    성전에 관한 상세한 기술
    고유기록 사울왕국과 다윗과의 갈등(삼상1-26)
    다윗의 헤브론 통치(삼하2:1-7)
    사울가문에 대한 다윗의 특혜(삼하2-4)
    밧세바와 다윗의 간음사건(삼하11,12)
    암논의 범조와 압살롬의 반역(삼하13-19)
    사울가에 대한 기브온 사람의 저주(삼하)
    아도니야의 반란(왕상1)
    요압과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저주(2:1-12)
    요압,시므이,아도니야에 대한 솔로몬의 처 벌(왕상2:13-46)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왕상3:16-5:12)
    왕궁건립(왕상7)
    솔로몬의 축첩,우상숭배 허용(왕상11)
    북왕국 이스라엘의 역사
    아담에서 다윗까지의 이스라엘 족보(1-9)
    법궤를 옮기는 레위인들(15,16)
    다윗의 성전 건축준비(22)
    다윗 시대의 성직자 조직과 행정 조직 (23-27)
    다윗의 유언(28,29)
    상술기록 북왕국 예언자들의 활약 성전건축과 봉헌(대하3-7)
    유다왕국의 왕들의 치적
    유다에 있는 선지자의 생애
    요시야의 종교개혁

    출애굽기의 성막 건축에 더 가까이 의존하고 있다. 열왕기에서는 솔로몬이 기브온에 있는 산당을 방문한 것이 개인적인 헌신으로 비쳐지고 있으나 역대기는 온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모여 산당으로 올라간 거국적인 의식으로 다루고 있다. 역대기는 솔로몬이 여러번 산당들을 방문했음을 열왕기와는 달리 언급하지않고 있다. 다윗과 솔로몬을 이상화하면서 역대기자는 그들의 통치를 족장에게 주신 약속으로 표현한다. 역대기는 역사에서 성전이 차지하는 지배적인 역할과 대조적으로 기사 자체는 열왕기보다 훨씬 더 간략하다.

    열왕기서의 내용을 역대기서와 비교해 볼 때 열왕기는 양분되는 국가적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역대기는 오로지 유다 왕조만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스라엘을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또한 유다와 관련된 문데가 발생했을 때에만 북쪽 이스라엘의 사건을 삽입하고 있다.

    한편 열왕기는 바르고 완전한 역사적 정확성을 확실케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역대기는 한정된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으며 따라서 다윗의 범죄를 고의적으로 범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A.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비교 대조하라.

    (관심상의 차이)

     

    문헌개요 :

    노르만 엘 가이슬러. 구약성경개론, 엠마오, pp214-229

    구약학회. 구약학회자료집 94-4 역사서 연구 , 총신대학신대원구약학회, pp74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동시대인이다.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각기 다른 직업을 갖고 있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고, 느헤미야는 평신도로서 아닥사스다왕의 궁중 관원이었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직무는 종교적이었고, 느헤미야는 시정에 관련된 것이거나 국가적인 일이었다. 각자는 그가 부르심 받은 사역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된 자들이었다. 제사자이며 서기관이었던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하여 성전을 중심한 영적인 갱신에로 백성들을 인도하기에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왕궁에서의 느헤미야가 익힌 훈련은 남은 자들이 살아 남기에 필수적이었으므로 정치·물질적인 재건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다. 지도자들로서 한쪽은 영적이고 한쪽은 사회적인 두 사람은 포로 후기의 남은 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느헤미야서는 에스라서의 자연스러운 후편으로서의 구실을 하고있으며 두 책들이 수세기 동안 한 단위로 간주되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에스라서의 기본주제는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지도하에 예루살렘에 돌아온 남은 자들의 영적,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 회복이다. 이스라엘의 성전 재건 예배가 소생되었으며, 그 백성이 정결케 되었다. 하나님의 신실성은 그들이 포로로 있는 동안에는 그의 백성을 주권적으로 보호하심과 이교국의 왕을 일으키셔서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 재건할 수 있도록 격려하심이다. “에스라의 과업은 율법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공동체를 재조직하는 것이었다.”

    느헤미야서는 유다의 정치적 지리적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처음 일곱장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에 할애되고 있다. 예루살렘이 유다의 영적, 정치적 중심이요, 성벽 없는 예루살렘은 하나의 성읍으로 간주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B. 에스더의 내용과 주제가 무엇인지 연구하라.

     

    문헌개요 :

    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신행협회, p356

    글리슨 아처. 구약총론, 기독교문서선교회, p479

    노르만 엘 가이슬러. 구약성경개론, 엠마오, p232

    셀프성경. 아가페,

    아가페성경사전. 아가페출판사, p1219,1230

    바울성경연구씨리즈, 에스더

     

    1. 내용

     

    페르시아와 아하수에로 치세 시의 이야기이다. 아하수에로는 宴會에서 왕후 와스디로 하여금 축제의 손님들 앞에서 면류관과 아름다움을 과시하도록 요구하였으나, 그녀가 거절하자 화가 난 나머지 그녀를 폐위시켜 버렸다.

    새 왕후를 선택하기 위해 경연대회가 열렸고, 기스 자손인 유대인 고아 에스더가 후보들 가운데 하나로 뽑혔고 결국 왕의 마음에 들어 왕비가 되었다. 그녀의 삼촌인 모르드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엿듣고는 에스더를 통해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이 일은 궁중 일기에 기록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총리가 된 하만은 모르드개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려는 것에 화간 난 나머지 유대인들이 그들의 특별한 율법들로 인해 왕에게 전적으로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진멸할 수 있는 칙령을 왕에게서 얻어 내었다(3).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그녀가 그녀의 백성인 유대인을 위하여 왕에게 중재해줄 것을 호소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했던 하만은 그가 교수대에 달도록 명령했던 모르드개에게 역설적으로 경의를 표하고, 왕에 대한 음모를 발견한 대가로 그의 공적을 공표하도록 왕의 명령을 받았다. 또 다른 연회에서 에스더는 유대인에 대한 하만의 음모를 밝혔는데, 그 결과 하만은 그가 달려고 세웠던 바로 그 나무에 달리게 되었다.

    모르드개는 하만을 대신하여 총리가 되었고, 유대인들이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칙령이 내려졌으며 그들은 그들의 대적을 진멸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이러한 기적적인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부림절이 제정되었다. 이 명칭은 하만이 유대인 학살을 위해 길한 날을 결정하기 위해 뽑은 부르, 곧 제비를 따라 지어진 것이다.

     

    2. 주제

     

    이 책의 주제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이방의 악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왕되심을 보여준다. 비록 그들이 고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그곳에 안주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기 백성에게 살아계신 언약의 하나님임을 확연히 보여주셨다. 이와같이 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귀환한 유다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나라에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도 원수의 손에서 지키시켜 보호하신다는 것을 본서를 통해 보여 주려고 했다. 따라서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의뢰할 대상임을 논증한다.

     

    C. 포로후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에 일어난 변화

     

    문헌개요 :

    레온 우드. 이스라엘의 역사, 기독교문서선교회, pp417-445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학출판부,pp409-451

    구약학회. 구약학회 자료집 94-4, 역사서 연구, pp78-79

     

    예루살렘의 몰락과 주요 백성들의 추방은 유다 역사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위기였다. 그들의 종교활동의 중심지였던 성전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야훼에 대한 신앙은 무너지고 강대국들의 신전의 웅장함과 약소 민족의 비극 앞에 그들의 유일신 신앙은 심각한 의혹을 받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민간생활의 중심으로 이어왔으나 이제는 폐허가 되었다.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바벨론으로 추방되었으므로 그 밑의 사람들이 결정하고 정책을 수립하여야 했다. 그러나 생활양식이 바뀌었다 할지라도 유다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추방은 일부분에 속한 것이었고 평민들이 구성하고 있는 대중성은 계속 이어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까지 이주해 거주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바벨론 포로시기;605-539)는 바벨론의 세력이 전성기에 달한 신바벨론 제국시대였다. 제국적인 지위는 느부갓네살의 통치로 이루어졌으며, 고레스 대제의 지휘 아래 페르시아 군대가 패배를 가져다 준 주전 539년까지 계속 되었다. 유대인 포로들은 이때의 초기부터 페르시아 정복 후 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이들 포로 중에는 다니엘과 같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반 포로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의 조상이 애굽에서 당한 속박의 상태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했다. 그들 나름대로 조직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이주의 자유도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서신의 특권까지 누려, 유다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또한 고용의 기회가 있었으며, 비옥한 땅에서 살았다.

     

    이들의 징계는 70년의 외국인 지배 후 끝이 나는데 이들의 귀향이 이루어지기 전에 세계 주도권에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패배시키고 주권을 장악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이제 유다의 귀향과 그 이후 역사는 이 새 세력 밑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페르시아의 판도 밑에 유대인에게는 중요한 사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세번에 걸친 귀환이었다. 첫번째는 페르시아의 바벨론 정복 직후인데(주전538, 1:1) 세스바살이 이끌었다. 이제 유대인 공동체의 재건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무리만 귀환했다. 왜냐하면 너무먼 거리의 여행의 위험과 복구사업의 장래의 막연함과 또 이때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국으로 돌아가 이들이 해야할 첫번째 일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주위의 반대도 있었지만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독려와 스룹바벨의 노력으로 다리오 6년에(주전5153, 6:15) 성전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스가랴에 의해 설파된 다윗 왕권의 재건과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다, 고조되었던 유대 공동체의 희망은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전은 그런데로 백성의 모임의 장소로서 신앙을 일깨워 주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제의 공동체라는 일체감을 심어 주었다.

     

    두번째는, 80년 후로서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Artaxerxes Longimanus, 주전458, 7:7) 7년째 해인데 에스라가 이끌었다. 에스라 역시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귀환에 대한 주목할 만한 특권을 받았다. 이 특권은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리하여 에스라의 관심과 임무는 물질적으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재건시키는 일이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눈에 들도록 살기 위해서 개혁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이방인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혼을 취소하도록 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 이후 13년이 지나 아닥사스다 20년인데(주전444, 2:1) 느헤미야가 이끌었다. 느헤미야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데에 있었다. 백성들이 그 땅에 돌아온지 거의 백 년이 되는 데도 아직 성벽이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성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적들의 놀람과 미움속에서 52일 만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공동체를 재조직하였다. 즉 느헤미야는 공동체의 정신적 지위를 확고히 하고 행정상의 개혁을 단행하였고, 에스라는 공동체의 정신(종교)생활을 재조직하였다.

    특별히 에스라의 개혁은 율법에 의거한 공동체의 재건인데, 비록 그들이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있어 국가적 주체성이 없고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더라도 율법을 고수함으로 하나의 실존적 민족으로서의 공동체를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루살렘의 파괴와 그에 뒤이은 포로생활은 이스라엘 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바벨론 제국의 일격에 이스라엘의 국가로서 존립은 끝이 났고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삶을 표현하고 있었던 모든 제도도 끝장이 났다. 그것들은 결코 다시는 과거와 똑같은 형태로 재조직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국가가 파괴되었고 국가 제의도 필연적으로 중단되었으며 오랜 국가적-제의적 공동체는 결단이 났다. 이스라엘은 당분간 삶의 터전을 잃고 기진맥진한 개개인들이 몰려 사는 집단이 되어 버렸고 외관상으로는 어느 모로 보나 이미 하나의 민족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역사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재난을 이기고 살아 남았고 또한 옛 공동체의 잔해(殘骸)로부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민족으로서 삶을 재개하였다. 연단되고 강화된 이스라엘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살아 남아서 앞으로의 모든 세기에 걸쳐 추구하게 될 방향을 점차로 발견해 나갔다.

    귀환한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으며 성경의 율법을 설명할 수 있는 서기관이라는 새로운 계층의 도움을 받는 대제사장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교육은 잘 수행되었는데 선지자들은 성전재건에 대한 사역의 태만과 십일조 납부의 기피에 대한 책망을 하기는 했지만 우상숭배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주변 국가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특별히 이 당시 차이점을 강조했던 세 가지는 안식일의 엄격한 준수, 할례시행, 그리고 유대인의 음식에 관한 규례 등 이었다. 종교생활의 초점은 성전이 아니라, 포로기 시대에 회합과 교육의 장소로 발전한 각 지역의 회당이 되었다.

    B.C.2 세기 이후 묵시문학이라는 새로운 기록형태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묵시적인 책들의 기록자들은 세계의 종말이 가깝다고 확신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나 로마 같은 이방 통치자를 멸망시키고 역사의 새 기원을 시작하기 위해 이제 막 개입하신다는 주장이다.

     

     

     

     

     

     

     

     

     

     

     

     

     

     

     

     

     

     

     

     

     

     

     

     

     

     

     

     

     

     

     

     

     

    D. 포로 후 시대의 국제 정치상의 변화

     

    문헌개요 :

    구약학회. 구약학회 자료집 94-4, 역사서 연구, 총신대학신대원, pp75-77

     

     

    B.C.6세기 전반부에 바벨론은 가장 강력한 나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자신이 도구로 쓰시는 왕들을 보내실 것이며 또한 비록 이방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실 수 있다고 외쳤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바벨론 동쪽에서 메대와 페르시아(바사)의 두 왕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동쪽 멀리 인도까지 정복하였다. 그런 후에 고레스는 바벨론을 공격하였다. B.C.593년 바벨론 성이 함락되었고 그는 제국 전체를 차지하였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이전 제국보다 땅을 더욱 확장하였다. 그들은 이집트도 정복했으며 오늘날의 터어키 전체 지역도 차지했다. 바벨론을 함락시켰을 때, 고레스는 제국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을 여러 개의 주로 분리하여 각각의 주마다 지방총독이라고 불린 통치자들을 세웠다. 이 총독들은 주로 페르시아 사람들이었지만 그 휘하의 그 고장 출신 통치자들도 어느 정도의 권력을 보유하였다. 그 이외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고유의 관습과 종교를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대로 고레스는 성과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유대인들은 제국내의 여러 지방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에스더서의 기록대로, 페르시아의 중요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수사에는 후대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가 유대인 여자를 왕후로 삼아 같이 살고 있었다. 여러 나라에는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소환된 것 처럼 유대인의 분산은 훨씬 후대인 신약시대에도 있었다. 이렇게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성전이 멀었기 때문에 교육과 예배의 중심지로써 각 지역의 회당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 회당으로 말미암아 회당의 형태를 따라 조직된 기독교 교회는 후에 급속히 확장될 수가 있었다.

    거대한 대도시 페르세폴리스의 건설자요, 서부 인도의 정복자이기도 했던 왕 다리우스(다리오) 1(522-486B.C.)는 제국을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그는 B.C.513년 북부 그리스의 마케도냐를 점령하였다. B.C.490년 페르시아는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에게 패하였으며, 이로써 역사의 무대는 아주 오래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사건들로 옮겨지게 된다. 크세르큿스1(B.C.486-B.C465)는 그리스를 침공하여 아테네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하였다. 아닥사스다, 다리우스 2세 등의 그 뒤를 이은 일련의 왕들은 계속해서 전쟁에 휘말렸다. B.C.333년 그리스의 용사인 마게도냐의 알렉산더가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그의 화려한 정복 전쟁을 개시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그리스, 메대, 그리고 이집트의 운은 기복이 심하였다.

    알렉산더는 22세 때, 고대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는 이집트를 페르시아로부터 해방시켰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리고는 동쪽으로 더 나아가 인도까지 위협하였으며, 그의 진로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정복했고 가는 곳마다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는 B.C.323년 불과 33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가 죽자마자 거대한 그리스 제국은 그의 네 명의 장군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시리아의 안티오크에 거점을 둔 셀류시드 왕조는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 거점을 둔 프톨레미 왕가는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통일체로서의 그리스 혹은 헬라 세계가 계속되었으며, 공용어로써 그리스어가 통용되었고, 일상적인 그리스의 문화양식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배경들은 그 다음에 이어진 사건들, 곧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땅에 귀환한 후, 신약시대 때 까지 약500년간 외국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다. 그리스의 통치 아래에서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가에 공물을 바쳤다. B.C198년 시리아의 통치자였던 셀류시드의 안티오쿠스 대왕은 프톨레미 왕가를 격파하고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B.C.190년 마그네시아 전쟁에서 로마인들에게 패하였다.

    로마인들은 셀류시드 제국에 가혹하게 세금을 매겼으며, 로마인들과 셀류시드 왕가의 그리스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대로 성읍과 성전을 약탈하곤 하였다.

    마침내 이런 행동은 마카비 항쟁을 촉발하였고, 유대인들은 한 동안 자유를 쟁취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유대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로마인들이 개입할 기회를 주었다. 마지막 대제사장은 B.C.37년에 사형당했다. 그리고 유대는 시리아 주의 총독의 지배를 받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계속 누렸으며 고유의 통치자를 갖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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