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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위기 1장의 중요성
    신학참고자료/구약 2021. 11. 30. 07:06
    그 전부를 단 위에서 불살라
    1:1-17
    김 근 주 (장신대 신학박사과정/구약학)

    . 레위기 1장의 중요성

    제사제도는 어떤 종교나 신앙 체계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이를 통하여 그 종교의 중심인 신과 사람과의 만남이 드러나게 되고, 이러한 만남으로부터 여타의 생활에 대한 윤리가 파생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신앙 체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가장 기본적이며 원칙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제사제도를 점검하고 올바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예배의 개혁이 신앙의 개혁과 변화에 최우선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그 주된 내용이 제사에 대한 규례들인 레위기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레위기의 제목은 레위인들을 연상시키지만, 그 내용은 제사장과 연관되어 있다.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는데, 1-16장이 전반부이고, 17-27장이 후반부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반부는 주로 제사에 관해 제사장들에게 알리는 지침들이라면, 후반부는 제사장들을 통해(17:2, 21: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가르침이다. 또한 전반부는 제사 지침을 통해 어떻게 이스라엘이 잃었던 거룩과 정결함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면, 후반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거룩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레위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며 어떻게 그 분의 거룩하심을 따라 자신들의 거룩을 지켜 나갈 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한편 레위기의 전반부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10장이 여러 제사 제도의 수행에 관한 것이라면, 11- 16장은 한 마디로 정결에 대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11-16장의 내용이 각각의 경우에 정결을 회복하기 위해 그에 합당한 제사가 드려져야 함을 알려주고 있음을 볼 때, 결국 1-10, 그 중에서도 1-7장의 제사에 대한 본문이 레위기의 중심 되는 부분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8-10장은 아론 가문이 합법적인 제사장임을 알려주는 본문이다).

    1-7장은 다섯 가지의 제사에 대한 규례를 알려 주는데, 이 제사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제사의 제물을 전부 다 태우는 제사와 제물의 일부만을 태우는 제사가 그것이다. 전부 다 태우는 제사가 번제(올라 hl*u))”이고 나머지의 제사들은 제물의 일부만을 태운다. 번제는 흔히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졌으며(5:7, 8:18, 9:2, 16:5), 이 제사는 제사장들에 의해 매일 드려져야 했다(29:42, 6:8-13). 나아가 그 단이라고 하면 당연히 성막 입구에 있는 번제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다(1:5, 2:2, 4:30, 34). 또한 이 제단 위에서 모든 종류의 제사가 다 드려짐에도 이 제단은 번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칭해졌다(30:28, 4:7, 10, 30). 이러한 점들은 레위기의 여러 제사들 가운데 번제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준다. 레위기는 번제의 규례를 알리는 본문을 가장 처음에 두고 있다.

    . 레위기 11-17절의 풀이

    . 본문의 짜임새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쉽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머리말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1)

    번제 예물의 종류(2)

    각 예물에 따른 번제 규정(3-17)

    소의 번제(3-9)

    양이나 염소의 번제(10-13)

    새의 번제(14-17)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본문의 주된 내용은 각각의 예물에 따른 번제 규례이다. 3-17절의 본문은 각 예물의 번제 제사에서 예물을 드리는 예배자가 해야 할 역할과 제사장이 해야 할 역할을 기록하고 있으며, 각각의 제사는 그렇게 절차를 따라 드려진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었음을 알리는 끝맺는 어구(“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로 마무리되고 있다.

    . 본문의 풀이

    1. 머리말(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1절 후반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알리는 상투적인 어구이다(4:1,14, 6:1, 8, 19, 7:22, 28, 8:1, 11:1, 13:1 ). 이 어구로 바로 시작하지 않고 그 앞에 덧붙여져 있는 전반절의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는 출애굽기 4034-35절을 연상시킨다. 마침내 성막이 만들어지매 하나님의 영광이 여기에 충만하게 되었고 모세는 그로 인해 이 성막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이 충만한 이 회막으로 그의 종 모세를 부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1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며, 이어지는 말씀의 근거와 출처가 바로 이 하나님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2. 번제 예물의 종류(2)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그에게 명하시는 내용은 하나님께 드릴 예물에 관한 것이다. “예물이라는 히브리어 명사 <코르반 /B*r+q*>드리다로 번역된 사역형 동사 <약크리브 byr]q=y~>는 같은 어근 <카라브 brq>를 지닌다. 이 어근은 가까이 나아가다, 접근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에 의하면 예물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상징하는 것이며, 예물을 드리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의미가 상실된 헌물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예물이 아니다. 예물에는 예물 드리는 이의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과 자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빈손으로 올 수 없었다. 그가 가지고 와야 하는 예물은 생축 중에서 드려야 했다. 이러한 생축에는 소와 양이 잇달아 거론되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가축이어야 한다는 점은 이러한 가축이 예물 드리는 이의 재산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귀중한 것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동물이라는 점은 가 드려지는 예물, 생명이 드려지는 예물을 의미한다.

    3. 소를 드리는 번제(3-9)

    흠이 없는 수컷의 소가 번제물이 될 수 있었다. 흠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병이나 상처가 없고 사지가 온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기에 흠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위에서 보았듯이 단순한 귀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 “흠이 없다는 것이 단지 가축의 신체적 상태의 온전함뿐만이 아니라, 예물 드리는 이의 자세의 온전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20:3, 4). 그러므로, 비록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다 할지라도 때로 하나님은 그러한 예물의 번제를 거부하신다.

    이 예물은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해 회막 문 앞으로 가져와야 한다. , 예물을 드리는 장소가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사 규정 전체가 그러하지만, 여기서도 제사 규정의 절대성을 엿볼 수 있다. “열납하시도록”(3)은 정확히 풀이하면, “그를 기꺼이 받기 위해”(리르초노 onx)r+l!)이다. 예물 드리는 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가 준비한 예물을 드릴 때, 하나님은 예물을 받으시면서 실상은 그 예물 드리는 사람을 열납하신다는 것이다(19:5). 예물이 단지 가축이 아니라, 예물 드리는 사람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이 여기서도 분명하다.

    이렇게 열납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4절에서 더욱 확연해진다. 예물 드리는 이는 자신이 가져온 예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이 행동을 통해 자신에게 있는 죄가 제물이 되는 짐승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6:21, 22, 30). 그래서 이 제물을 죽임을 통해 자신의 죄가 속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죄의 사상은 속죄제에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번제는 죄로 인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본문 4절은 번제 안에도 속죄의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죄된 인간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회막에 나아감으로 인해 닥쳐올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속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특별한 죄와 무관함에도 하나님의 내리시는 온역을 막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내어야 했던 반 세겔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속하였던 것과 동일한 원칙으로 볼 수 있다(30:11-16). 아울러,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안수를 통해 하나님이 그 제물을 열납하시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을 속하신다는 점에서, 이 안수의식은 드려진 제물과 드리는 사람의 일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대 바빌론에서도 병자의 몸을 제물이 되는 동물의 몸으로 대신하는 제의가 있다. “돼지를 병자 대신으로, 그 살을 병자의 살 대신으로, 그 피를 병자의 피 대신으로 드려라. 신들이 그것을 받을 것이다. 바빌론의 이러한 풍습은 병자에게 해당되던 주술적인 관행인데 비해, 이스라엘의 규례는 전혀 마술적인 요소가 없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약속을 통해 사람과 일치된 짐승을 통해 사람이 대속된다는 것이 두드러진다.

    이제 예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이 소는 더 이상 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물 드리는 이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5절에 나오는 여호와 앞에서는 제물을 잡는 회막 안의 정해진 거룩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번제 짐승을 잡는 장소가 이미 지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예물을 드리는 자는 이제 그 장소에서 스스로 그가 가지고 온 소를 잡는다. 포로 이후의 제사제도에서는 레위인이 이 역할을 수행했던데 비해(44:11), 레위기 1장은 예물을 드리는 평신도가 직접 소를 잡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레위기 1장의 제사제도가 보다 초기의 것임을 알려준다.

    그가 이제껏 키우고 먹이던 소에게 안수하고 이제 자신을 대신하여 죽이는 것이 번제의 처음 장면이다. 이것은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던 아브라함의 경험에는 비할 바가 못되겠지만, 결코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장면이 아니다. 소를 죽일 때 흐르는 피는 제사장이 어떤 그릇에다가 받았을 것이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서 번제단의 사면에 뿌린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데(17:11) 이 피를 번제단에 뿌린다는 것은 이 소의 생명이 번제단에 완전히 바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 소는 예물 드리는 자와 일치된 소임을 기억할 때, 지금 번제단에 뿌려지는 피는 단순히 소의 피가 아니라 바로 예물 드리는 이 자신의 피인 것이다. 그가 예물인 소를 죽이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소를 잡고 그 피를 뿌리는 번제단도 결코 아름다운 모양은 아니다. 매번 제사를 드릴 때마다 뿌려지고 부어진 피로 인해 온통 피로 얼룩져 있는 것이 번제단의 모습일 것이다.

    번제의 이러한 강렬한 인상은 6절에서 한층 뚜렷해진다. 이제 예물을 드리는 이는 그가 잡은 소의 가죽을 벗겨 내고(7:8에 의하면, 이 가죽은 제사를 진행하는 제사장의 몫이다), 그 몸을 여러 조각으로 조각 낸다. 제물을 머리와 기름 외에 여러 조각으로 조각 내는 것은 번제만의 특징이다. 이것은 번제가 동물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드리는 제사라는 점을 보여준다. 소의 피를 제단에 뿌린 제사장은 이제 제물을 태울 나무를 제단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이렇게 배열하는 까닭은 그 위에 올려질 제물들을 완전하게 태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제사장은 그 놓은 나무 위에 예물 드리는 이가 잡고 조각 낸 소의 부분들을 올려놓는다. 그것들은 소의 머리와 몸통의 조각들과 다리와 기름과 내장이다. 이 가운데 다리와 내장은 제사장이 물에 씻은 다음 나무 위에 올렸다. 그리고 제사장은 이것들에 불을 놓아 태우며 이 과정에서 그 타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9절 후하반절(“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은 이 번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과를 알려준다. “화제는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화제로 드리는 제사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제물의 타는 냄새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것은 특이하다. 하나님은 번제를 통해 제물이 타는 그 냄새를 맡고서 이 제사를 열납하신다는 것이다(8:21). 이러한 표현은 고대 중동지방의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홍수에 관한 설화를 담고 있는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Epic)는 신들의 모략으로 닥쳐온 대홍수를 피한 우트나피슈팀이 드린 제사에서 제물이 타는 냄새를 맡고 신들이 파리 떼처럼몰려왔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화들은 신들의 음모와 변덕을 보여주는 데 비해, 구약 성서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고대의 제의적 문화적 표현을 통해(이것이 이스라엘에게서 생겨난 것이든, 아니면 주위의 문화적 표현을 받아들여 차용한 것이든), 한계가 있는 인간의 제사를 받으시고 흠향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해 주며,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인간간의 교제를 알리고 있다.

    제물이 타는 냄새를 맡고서 흠향하시는 하나님은 이방의 신화들이 전하는 것처럼 고기의 냄새에 파리 떼가 준동하듯 동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사실, 향기로운냄새는 제물의 냄새라기보다는 예물 드리는 이의 마음의 냄새인 것이다. 제물의 냄새를 통해 지금 하나님이 맡으시는 냄새는 그 제물과 일치된 예물 드리는 이의 마음을 맡으시는 것이다.

    예물 드리는 이는 자신이 안수함을 통해 자신과 일치된 이 소를 잡고 가죽을 벗기고 조각 내면서 사실은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가죽을 벗기고 자신의 전체를 조각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조각 내 자신을 제단 위에서 완전하게 불태우는 것이다. 예물 드리는 이가 이러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릴진대 어찌 그 냄새가 향기롭지 않겠는가?

    4. 양이나 염소를 드리는 번제(10-13)

    소보다 작은 크기의 예물들인 양과 염소에 대한 규례가 간략하게 설명되고 있다. 소의 번제와 차이가 나는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예물에 안수하는 규정이 생략되어 있고, 그 가죽을 벗기는 것도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제물을 잡는 곳을 여기서는 단 북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본문에서 볼 때는 소의 경우와 다른 것이 아닌가 여겨질 수도 있지만, 번제의 가죽이 제사장에게 돌아간다는 78절의 규례를 볼 때, 이 경우에도 역시 가죽을 벗겼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같이 생각한다면, 안수의 규례도 이와 같을 것으로 여겨진다.

    5. 새를 드리는 번제(14-17)

    이것은 소나 양, 염소 같은 예물을 준비할 수 없었던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번제규례이다. 예물의 크기와 종류가 다름으로 인해 그 절차도 차이 난다. 제사장은 예물로 드려진 비둘기를 번제단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그 피는 단의 옆면에 흘려졌다. 이것은 그 피의 양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를 비틀어 끊다고 번역된 동사 <말라크 ql^m*>목덜미를 부러뜨리다를 의미한다. 번제의 경우에는 머리를 완전히 잘라 버리지만, 속죄제의 비둘기의 경우에는 이것을 완전히 두 동강으로 자르지 않는다(5:8). 예물을 드리는 이는 새의 몸에서 모이 주머니(<무르아 ha*r+m%>, 개역에서는 멱통”)를 떼내어 그 속의 더러운 것들과 더불어 재 버리는 곳에 버렸다. 그리고 그는 새의 날개를 찢되 이전의 번제처럼 조각을 내는 것이 아니라, 몸통에 붙어 있을 정도로 찢는다. 다음에 제사장은 그 머리와 몸통을 제단 위에서 태운다.

    . 본문이 주는 의미

    레위기 1-7장에서 전하고 있는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존속되지 않는다. 제사제도 안의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되었다. 그럼에도 신약의 많은 본문들은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가져온 표현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전달한다.

    바울은 로마서 12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권면한다. 이 구절이 로마서의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눌 때 전환이 되는 구절임은 잘 알려져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얻은 구원을 소유한 성도들에게 산 제사가 될 것을 권한다. 이것은 그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대속의 제사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미 구원을 얻은 백성들의 삶에 관한 본으로 구약의 제사를 들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구약 사용은 레위기의 제사 제도를 이해하는 안목을 제공한다.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의 내용을 보면서 이것이 단지 짐승의 제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자신이 제물이라고 보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레위기 자체에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제물과 예물 드리는 이가 동일시된다는 위의 관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었다. 구약의 제물은 죽어지는 것이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자신이 살아 있으되 이러한 자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 레위기의 번제 규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 예배의 참된 의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구약의 제사라면, 오늘날에 그에 해당하는 것은 예배일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번제로 드리는 제사는 결코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다. 이 제사는 제물의 피가 튀고 단 사면에 발라지며, 제물이 조각조각 나고, 심지어는 날개를 찢되 완전히 조각 내지는 않는 참혹한 광경도 나타난다. 그리고 가죽과 더러운 모이 주머니를 제외하고는 전체가 불태워진다. 그야말로 이 제물은 완전하게죽는다. 그래서 번제는 온전한 번제”(<칼릴 lyl!K*>, 33:10, 51:19)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태워지는 냄새를 하나님은 즐기신다. 어떤 이들이 기독교를 도살업자의 종교라고 비난할 정도로, 제물이 죽고 그 피가 뿌려지는 것은 제사의 핵심이다. 이것이 제사이고 나아가 이것이 예배의 한 모습인 것이다.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단지 제물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통해 자신을 그렇게 죽이듯이, 번제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자세를 알려준다. 예배는 자신을 이렇게 죽이는 시간이다. 예배를 통해 제물이 된 우리 자신을 죽이고 우리의 가죽(위선, 외식, 형식?)을 벗기고 자신을 조각조각 내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자신을 태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죽이어 하나님께 바칠 때 그 냄새를 즐거워하신다. 번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올라>올라가다를 뜻하는 동사 <알라 hl*u*>에서 파생한 것이다. 이에서 보자면, 번제의 핵심은 바로 이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헌신과 자기 부인의 냄새, 그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냄새인 것이다. 이러한 헌신이 없는 채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만을 노래한다면, 번제에서 나는 피비린내와 고기 타는 냄새 없이 제사가 드려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제물만이 아니라, 자신이 제물과 동일시되는 이러한 바른 제사를 기억한다면, 제사가 드려지기만 하면 효력이 있다”(ex opere operato)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 절대적인 순종을 전하는 규례

    번제의 규례를 포함하여 레위기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규례들은 그 까닭이나 이유가 주어져 있지 않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왜 그렇게 하면 안되는지를 본문은 말해 주고 있지 않다. 그로 인해 레위기의 해석은 여러 가지의 다양한 견해를 초래했다. 그 중에서도 알레고리적인 해석은 레위기의 해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의 타당성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책이다. 왜 일정한 장소에서만 제물을 잡아야 하는가? 왜 제물의 피를 번제에서는 제단의 사면에 뿌리고 속죄제에서는 피를 찍어서 휘장에 뿌리는가? 그리고 왜 새의 번제는 피를 제단 옆면에 바르는가? 왜 가죽은 벗겨서 태우지 않는가? 왜 새의 날개를 찢되 완전히 찢어 내지는 않는가? 성서에 의하면, 모세에게 이러한 규례를 상세히 알리신 여호와께서 이러한 세부적인 행동들에 대한 까닭은 알려 주지 않으셨다. 우리들은 다만 이러한 본문들에서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의 지엄함을 깨달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명령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번제 규례 뿐 아니라, 레위기 전체의 규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이 글 첫머리에 말한 예배의 개혁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이다. 우리가 돌아가고 회복해야 할 예배의 상을 레위기의 번제 규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도들을 편안하게 하고 부담 없게 하려고 애쓰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점점 약화되어 가는 예배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왠지 값싼 구원이라는 본회퍼의 말이 생각남은 어찜일까? 피냄새가 나고 제물의 몸 전체가 태워지는 그런 예배는 오늘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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